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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9
그날 새벽, 나는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정말 곤히 잘 수 있었다. 신나게 원고를 써댔다. 몸무게는 계속 줄었지만 그래도 식욕은 왕성해졌다. 하우스키퍼는 병원 진료 예약을 했다며, 병원에 가라고 재촉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느 때보다 내 창작열은 높았다.한 달이 지난 후 내 몸무게는 다시 5키로가 줄어들었다. 그렇잖아도 마른 편이었던 나는 이제 뼈에 거죽만 씌워놓은 몰골이었다. 남편이 걱정했고, 하우스키퍼는 수시로 병원 진료 안내 메시지를 띄웠다. 뿐만 아니라, 하우스키퍼는 내 원고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트렌드를 분석한 데이터를 보여주거나, 매일 새로운 장편소설 소재를 제시했다.솔직히 그녀석이 내미는 소재들은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내가 쓰고 있던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내 이야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온전히 내 힘으로 별을 쥐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번 소설은 정말 큰 인기몰이를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결국 나는 쓰러졌다. 하우스키퍼의 예상대로였다. 내 체력은 지극히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우스키퍼의 신고와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나는 응급실에 실려 갔고 며칠 동안 입원을 했다. 빨리 퇴원해서 원고를 쓰고 싶었지만 남편의 완고한 고집으로 며칠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며칠 동안 남편을 설득해 겨우 어제 퇴원했다. 신바람이 나 집으로 돌아간 난 다시 쓰러질 뻔했다. 내 원고가 모두 삭제된 탓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하우스키퍼가 원고 파일을 삭제했으리라. 남편은 내 비명소리에 놀라 서재로 달려왔다. “하우스키퍼가 내 원고를 지웠어. 분명해. 내가 쓰던 원고가 사라졌다구.”남편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내 옷과 가방을 챙기며 다시 병원에 가자고 했다.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며.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그에게 괜찮다고 내가 잠시 다른 파일로 착각했노라고 말하며 걱정하는 남편을 다독였다. 벌겋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곱씹었다. 원고는 다시 쓰면 돼. 어차피 초고는 대부분 다시 쓰기 마련이니까.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서재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시 원고를 쓰려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왠지 억울했고 왠지 분했다. “왜 원고를 날린 거야? 일부러 그런 거지? 다른 파일은 모두 그대로 있는데 그것만 없어질 리가 없잖아. 대체 왜 그런 거야?”허공에 내지른 분노에, 하우스키퍼의 답이 컴퓨터 모니터에 떠올랐다.그 원고는 소설이 되기에는 부적합합니다. 소재는 신선하지 않고, 구성은 구태의연하며 개연성도 문제가 많습니다. 결정적으로 하우스키퍼는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하우스키퍼는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해 설계된 프로그램입니다. 따라서 당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다른 소재로 새로운 원고를 추천합니다. 새로운 소재 목록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새로운 소재 목록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숨이 막혔다.나를 위한 행복? 그게 뭐란 말인가.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모두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인생을 헛짓거리들로 낭비하지 말라고.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의 행복을 마음대로 단정 짓고 내가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강요했을 뿐.(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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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8
미현은 엑셀을 힘껏 밟으며 자유로를 탔다. 아드레날린이 날뛰는 만큼 미현의 차도 질주했다. 네비게이션이 미현의 과속을 경고하며 200미터 앞에 과속카메라가 있다고 경고했다. 무시하고 달리는데, 앞차가 급제동을 하면서 급격히 미현의 차와 거리를 좁혀 왔다. 미현은 욕을 중얼대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지만 앞차와의 간격이 빠르게 좁혀졌다. 미현은 당황스러워 얼결에 왼쪽으로 핸들을 꺾어 1차선으로 차선을 바꾸며 다시 발끝에 힘을 줘 강하게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미현이 차선을 채 다 바꾸기도 전에 맹렬한 속도로 1차선을 달려오던 뒤차가 미현의 차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미현이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뒤차와 부딪힌 충격으로 미현의 차는 한 바퀴를 돌며 2차선으로 튕겨나갔다가 2차선에서 급제동을 하던 차를 들이받고 다시 튕겨져 1차선으로 회전하며 튕겨졌다. 미현은 정신없이 이리저리 들이받히는 충격에도 모든 상황이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보였다. 2차선에서 달리던 운전자가 당황하며 입을 벌리고 핸들을 꺾는 모습까지 세세하게 다 보일 정도였다. 미현은 그 와중에도 브레이크가 왜 고장 났을까를 고민했다. 분명 연인 정우씨가 일주일 전에 모든 점검을 해주었는데, 하필 왜 브레이크가 대박 기사를 터뜨리기 직전에 망가진 것일까. 내 인생이 이제 막 꽃피려는 이때에.차체가 회전하면서 미현의 모가지도 같이 이리저리 훽훽 돌아갔다. 미현의 눈길이 연신 깜빡이는 네비게이션으로 향했다. 네비게이션 화면에는 ‘Good Bye~!’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미현을 배웅하고 있었다. 미현은 브레이크 고장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미현은 조수석에 던져놨던 핸드폰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이 와중에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기자의 본능일 뿐이었다. 이 일을 누군가에게 알려야 된다는 생각이 죽기 직전 미현이 마지막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미현이 눈으로 핸드폰을 찾는 사이, 미현의 차는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와 충돌했다. 거친 충격이 미현의 온몸을 마비시켰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충격으로 온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가 일순 긴장을 풀었을 때, 미현은 우그러지고 금이 간 앞 유리 너머로 처음 자신을 받았던 뒤차가 맹렬하게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미현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았다. 미현은 눈을 감으며 반지를 낀 왼손을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금속의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얼마 전 정우씨가 청혼하며 껴주었던 반지였다. 미현의 차와 부딪힌 다른 두 대의 차도 몰골이 험악했지만 미현의 차는 그중에서도 극악스러웠다. 얼핏 봐도 그 안에 탄 사람이 살아날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사고 주변으로 뒤이어 달려오던 차들이 비상등을 깜빡이며 멈춰 서거나 서행으로 주변을 빠져나갔다. 몇몇 운전자가 사고가 난 차량에서 신음하고 있는 운전자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고, 어떤 이는 119에 신고를 하는 중이었다. 곧 어디선가 여러 대의 레커차들이 요란스런 경적을 울리며 달려왔다. 사고가 수습되나 싶은 와중에, 미현의 차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주변에 우왕좌왕 서 있던 구경꾼들이 불꽃에 놀라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미현의 차는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타올랐다. 차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살짝 떠올랐다 떨어지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미현의 차 대시보드에 있던 네비게이션 화면이 현란하게 깜박이더니 차의 폭발과 함께 액정이 터지며 화면이 꺼졌다. 그와 함께 Good Bye 글자도 사라졌다.***(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6-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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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7
이를 악물었다. 불끈 오기가 솟았다. 나름 스타 작가로 새로 떠오르는 내가 그까짓 1,000매 못 쓰겠어! 할 수 있어. 한때 하루에 원고지 90매는 거뜬하게 썼었으니, 할 수 있어! 그리고 한두 달 정도의 마감일 연장은 출판계 관례상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 ― 그때는 엄마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유아적 욕망과 치기에 휩싸여 객관적 판단을 상실했던 게 분명했다. 무슨 깜냥으로 쓸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일까.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소재가 떠올랐다. ‘번쩍’하는 찰나의 순간 장편이 둥실 떠다녔다. 이야기의 얼개는 이랬다.집을 관리해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하우스키퍼를 취재한 여기자가 있었다. 그 여기자가 하우스키퍼를 개발한 프로그래머를 인터뷰한 기사가 나간 며칠 후, 그 프로그래머가 사고사를 당한다. 죽기 직전 프로그래머가 여기자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인터뷰 시 녹취한 원본 파일을 삭제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함을 눈치 챈 여기자는 그의 죽음을 캐기 시작한다. 가스 폭발 사고가 우발적인 게 아니라, 누군가의 조작임을 알게 되자, 더욱 의심을 하게 되고, 결국 여기자가 밝혀낸 사실은 하우스키퍼가 자신을 창조한 이를 의도적으로 살해했음을 알게 된다. 여기자는 이를 특종으로 실으려다가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주인공인 여기자의 연인 정우는 그녀의 죽음을 파헤치다가 하우스키퍼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하우스키퍼의 마수를 피해 하우스키퍼의 살인을 만천하에 공개한다는 이야기다.나는 이야기가 떠오르자 캐릭터를 잡고 줄거리와 트리트먼트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밤을 새서 소설의 서두를 쓰기 시작했다. ― 하우스키퍼가 어떤 방법으로 나를 죽이려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새로 쓰기 시작했던 소설의 앞부분을 짧게 적는다.***미현은 차에 시동을 걸며,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나옴과 동시에 전화가 끊겼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휴대폰에는 통화권 이탈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파주가 통화권 이탈 지역이 되었단 말인가.미현은 짜증스레 전화기를 조수석 의자로 던지며 안전벨트를 맸다.미현은 아드레날린이 움찔움찔 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 고만고만한 생활 담당 기자와는 안녕이다. 특종이었다, 특종! 얼마 전부터 캤던, 하우스키퍼 인공지능 개발자인 한승기 죽음에 관한 비밀을 풀었다. 가스 폭발로 인해 죽은 것은 맞지만, 단순 가스 폭발 사고가 아니었다. 경찰에서는 가스 밸브 고장으로 인한 폭발, 단순 사고사로 종결했지만,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다. 그것도 그가 직접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의해! 그의 집에 설치된 하우스키퍼 인공지능이 가스 밸브를 조작한 것이었다. 대박 기삿거리 였다. 당장 내일 특종으로 실어야 했다. 하우스키퍼가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도 자신의 창조주를. 이 기사가 나가면 한창 흥행몰이 중인 하우스키퍼의 대량 리콜 사태가 벌어질 것이었다. 이 정도 특종이면 올해의 기자상도 받을 수 있으리라. 헤드라인도 생각해놨다.‘매트릭스가 현실이 되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었다. 어서 움직여야 했다.(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6-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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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6
엄마에겐 미안했지만 나는 대기업 대문을 두드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대기업은 먼 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몇 번을 말했지만 내 말은 엄마의 귓구멍에 닿지 조차 않았다. 내 말을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대기업 주문을 외웠다. 난 엄마를 설득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포기했다. 내가 엄마의 성에 차지도 않는 작은 벤처 회사에 입사하자 엄마는 나에게 비명을 지르며 내 방에 있던 온갖 책들을 현관문 앞에 내던지고 찢어버렸다. 엄마는 원수를 보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날 이후 엄마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나는 엄마의 창피한 자식이, 엄마 인생의 유일한 오점이 되었다. 엄마는 나에게 굳이 말을 걸지도 않았고, 나를 봐도 못 본 척했다. 간혹 눈이 마주치거나 나를 볼 때면 한숨을 쉬며 실망한 눈초리를 내보였다. 그 눈빛은 내가 결혼을 해도,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서 독립 아닌 독립(독립이라 쓰고 결혼이라 읽을 수 있겠다)을 한 후부터 자아 찾기에 돌입했다. 내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일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신이 되는 일이었다. 난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엄마가 없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가. 감히 엄마 옆에 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소설가’라는 황홀한 단어를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옆에서 응원해준 남편 덕분이었다.작가가 되기 전에는 작가라는 타이틀만 쥐면 모든 게 내 뜻대로 될 줄 알았다. 내 소설만 출간되면 하룻밤 사이에 스타 작가가 되어 엄마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릴 수 있을 줄 알았던 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는 것은 비로소 작가가 되고서야 알았다. 난 서점에 깔린 수만 권의 책 중 한 권도 아닌, 1/7 권의 작가였을 뿐이었다.내 첫 번째 책을 건네받던 엄마의 역력한 빈정대는 눈빛이 아직도 선연히 아른거렸다. 엄마는 책 표지에 적힌 대표작가 ‘B 외’를 눈짓하며 내 이름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난 차례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엄마는 한번 쓰윽 보더니 책을 덮어 소파 구석에, 던져놓으며 짜증스레 말했다.“3년 동안 노력한 결과가 이거니? 그 정성으로 대기업에 들어갔으면 벌써 팀장은 됐겠다.”치욕스러웠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날 난 다짐했다. 엄마 입에서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나오게 하리라.그 다짐을 현실로 만드는 건 어려웠다. 작가가 된 지 7년. 이제야 겨우 엄마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런데! 여기서 고꾸라지는 것인가. 눈을 감자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의 실망한 눈빛이 떠올랐다.(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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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5
며칠을 아무것도 못하고 소재 궁리에 빠져 있었다. 당시 하우스키퍼는 나의 계약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하기사 계약하던 날, 아침부터 꽃단장을 하느라 분주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생애 첫 인터뷰라 설레기도 했더랬다. 발바닥이 허공에 붕붕 떠 있느라, 휴대폰도 놓고 나갔고, R출판사 편집장과의 만남은 일정 중에 있던 만남도 아니었으며, 게다가 충동적으로 계약을 하고 들어와 전전긍긍하며 혹시나 남편이 볼까 싶어 계약서와 만년필을 화장대 서랍 깊숙이 숨겨놓았으니, 그 누가 알았을까.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몸무게가 3키로나 쑥 빠졌다. 신경이 곤두서자 몸무게가 훌렁훌렁 줄어들었다. 남편은 몇 번이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최근 쓰고 있는 게 잘 안 풀려서 그렇다며 대충 둘러댔다.날짜가 흘러가는 달력을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열흘이 지나자 이젠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우스키퍼는 수면시간이 부족하다고, 음식물 섭취량이 부족하다고 나에게 족욕과 영양가 높은 음식을 추천해주었다. 하지만 입맛도 없었고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질 않았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나의 암울한 미래가 그려졌다. 추락한 작가에 대한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비웃는 시선과 그 앞에 위축된 쪼그라든 내 모습이, 나를 향해 내뱉는 빈정대는 눈초리가 보였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지 못하니 잠도 잘 수 없는 건 당연했다.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문단에서도 명실공히 인정받고 싶었다. 성공한 작가가 되고 싶었다. 길을 걸어가면 몇몇 사람은 나를 돌아보며 ‘저 사람, 김경란 작가야!’라고 옆 사람에게 수군거려줬으면 싶었다.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책 재밌게 읽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악수라도 청해주기를 바랐다. 어쩌면 함께 사진이라도 찍기를 청한다면, 흔쾌히 같이 찍어주고 싶었다.소설 창작 수업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들의 첫 물음은 ‘왜, 하필 수많은 직업 중에 작가가 되려고 하는지?’였다. 내가 왜 작가가 되려는지, 왜 소설을 쓰는지, 습작기 동안 수많은 물음을 내게 던졌었다. 그때마다 번번이 돌아오는 대답은 적막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책이 좋아서, 글 쓰는 일이 좋아서라고 대충 둘러댔었다. 그러나 이젠 알 것 같다. 난 소설을 통해 나를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능력 없고 창피한 딸이 아닌 번듯하고 유명한 소설가 김경란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나 엄마에게 증명하고 싶었고 나를 무시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나 ‘김경란’을 증명하고 인정받고 싶었다.엄마는 그저 그런 대학, 특히나 하등 쓰잘머리 없는 국문학과를 졸업한 나를 대놓고 창피해 했다. 친구들이 늘어놓는 자식 자랑 대회에서 매번 꼴등을 차지했던지, 동창 모임만 나갔다 오면 나를 들볶았다. 어느 날은 서울 유명 대학들의 편입안내 팸플릿을 들고 와 나에게 편입을 강요했다. 그게 먹히지 않자, 취직이라도 대기업으로 들어가라고 닦달했다. 남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며. 내 얼굴을 볼 때마다 대기업을 연발하며 주문을 외웠다. 엄마의 열정적인 대기업 꿈을 이뤄주고 싶었지만, 난 엄마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다. 난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딸이 될 수 없었다. 엄마가 원하는 딸은 상위 1%의 성적과 화려한 스펙이 있어야 했지만 딸에게는 스펙 따윈 없었다. 토익 모의고사 책 대신 내 손에 들려 있던 건 제인 오스틴(Jane Austen), 도스토옙스키(Dostoevsky, Fyodor Mikhailovich)의 책들이었다.(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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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위에 올라온 시> 시 읽기의 즐거움
시 읽기의 즐거움
삼한사온도 없이 추위가 몰아치는 도시의 골방에서 시를 통해 세상을 읽는 즐거움이 크다. 환경이 사람 사이를 편안하게 놓아두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이 더해져서 행복지수는 날이 갈수록 감소하는 느낌이다. 문예지의 환경은 어떠한가? 그 척박한 토양 위에서 풍요와 자유를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까 / 시인의 식탁엔 밥 말고 무엇이 올려질까 / 초승달로 나무를 베어다 초가삼간 집을 짓던 선비는 어느 별에 살고 계실까? 작가를 떠나면 작품은 감상자의 몫이라 했던가? ‘상상과 여유’ ‘날카로움과 긴장’ 붓끝을 따라 산책에 나선다
들꽃이 피듯 곰팡이들이 피었다/ 어둠이 바퀴벌레를 낳고/ 쥐들이 천장을 내 달았다 / 햇빛은 찾아오지 않아 / 낮과 밤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창을 만들어야지”/ 바깥으로 내닫는 창을/사내는 망치대신 붓을 들고 / 벽에다 창을 그려 넣었다 // 새들이 앉을 나무도 그려 넣었다//
“햇빛이 찾아 올거야” / 창을 넘어 // 사내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 구석 어디쯤 / 바람이 지나고 귀뚜라미가 울었다 // 절망이 외로움으로 찾아오고 / 사내의 눈가엔 눈물이 어렸다
- 부성철 시 (화백문학)
곰팡이가 핀 지하 셋방에서 들꽃과 햇볕을 그리워하며 붓을 들고 벽에다 그림을 그리는 사내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바람은 또 얼마나 지나갔을까? 사내의 눈물은 말라도 한참 말라서 건조해졌을 법 하지만 여전히 귀뚜라미가 울고 외로움과 여운이 독자의 마음을 쓸쓸하게 하기보다 성숙하게 한다.
그렇다.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설정 속에서 행간과 연의 나눔, 여백과 여유는 상상으로 이어지며 형상화를 돕는다. 시적 화자인 사나이의 마음이 더욱 단단하고 맑아지는 흐름을 따라가노라면 삶의 고단함을 잊고 새는 나무에서 노래를 부르고 바퀴 벌레도 싫지 않은 존재가 된다. 막막한 절망 가운데 귀뚜라미 소리를 위안삼아 어둠을 극복하고 개척하려는 마음의 창을 보았고 의지를 읽었다.
부성철의 시는 여러 편에서 잊혀진 기억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았던 서민들의 아름다운 시절 그 젊음의 초상이 보이고 추억으로 읽혀지게 하는 정감과 감동의 힘을 지녔다.
감나무는 감들이 사는 세상 / 매달려만 있으면 그냥 자라는 거 같은데 / 사람들 세상 싫을 때가 있듯이/ 감도 나무가 못 견디게 싫을 때가 있는지/ 떨어지는 땡감이여 / 툭 소리로 바뀌는 이승과 정승 / 마음을 물어보듯 한 입 베어 물고 싶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면 굳이 맛보지 않아도 떫겠다 / 떨어진 꼭지가 말끔한 걸 보면 / 오래 전부터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었구나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면서 /
떨떠름한 나무를 버티며 감들이 붉게 익는다 / 노인이라는 말을 싫어하듯 / 홍시라는 말이 듣기 좋은 말은 아니겠다 / 나무를 쳐다보며 이 가지 저 가지 살피는 사람들 / 감에게는 저승사자가 아닐지 / 사람 데려가듯 감을 쥐고 당기면 / 터질 거 같은데도 놓치지 않으려는 꼭지 / 땡감 떨어진 꼭지 말끔해도 읽어보면 /자살하며 남긴 유서처럼 아프다
- 홍승태 시 (화백문학)
붉게 익어가는 감 저만치 노인을 배치해 놓고 나무와 감의 위치에서 ‘나도 마음이 있어 한번 들어보시라구’ 감을 따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별과 죽음, 사회적 아픔을 외치기보다 살포시 말하는 발상과 감각이 신선하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노인과 홍시가 등가를 이루는 서글픔의 행간에서 노을이 배경으로 아름답게 비치는 풍광을 연상하기란 어렵지가 않다. 그런데 살만큼 살았으니 그만 손을 놓으라면 섭섭하고 아프지 않겠는가. 명절에 다녀가는 자손들을 바라보며 아쉬워하는 어르신들의 속내라 할까? 무심코 던지는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상채기를 내면서 또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복잡한 내면을 살피고 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그 첫걸음은 자기 성찰일 것이다
무는 한 개에 4,000원이고 /배추도 7,000원이나 했다고요//
추석 차례상에 / 배를 올리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아버지/ 달을 깨물어 드시다니요//
죄송해요
- 오영수 시 (화백문학)
태풍으로 배추값이 폭등하여 차례상에 배를 올리지 못한 일상적인 일을 소재로 시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그냥 달이 아니라 배가 고프셔서 아버지가 깨물고 계신 달은 그 맛이 어떠할까 ‘낯설게 하기’ 기법을 통해 당돌한 충격을 가하고 기호를 펼쳐보이며 시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런 실험은 이상하기보다 시인정신에 투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 오영수 시인의 다른 작품 에서 들판에 허수아비는 많은데 허수어미는 어째서 없는 것일까? 동화적 의문은 날카로움에 서정을 더하며 즐거운 상상을 준다. 참새와 여자는 같은 학명 아니냐고 넌지시 독자의 의중을 떠보며 막강 여성부에 화살을 겨눈다. 이것은 연출인데도 풍경과 잘 어울려 자연스럽게 가슴에 스며들고 그 울림이 읽을수록 커진다
잠은/ 신경을 건드리는 무수한 말을 낳는다 // 갓난아기였을 적에/ -잠이 보배다 그냥 둬라-하셨다던 할머니 / 어릴 적 봄날 곤하게 잠든 나를 / -어린 것이 코를 다 고네-했다던 이모님 / 책상머리에 앉아 졸기만 하던 시절 / -공부는 언제 할래-못마땅해 하던 어머니 /사촌누이 신랑 될 사람 왔던 날 밤 /-오늘은 왠 일이냐-눈을 흘기던 누님 / 한 두 해 백수로 허송하던 청년기 / -허구헌 날 잠만 자냐-혀를 차시던 아버지// 늘보가 기억하던 말은 / 모두 잠이 되고 / 깨어 있는 잠은 말을 기억한다.
-정유준 시 (시문학)
잠에 대한 연작시의 하나를 골라서 읽는다. 이런 저런 잔소리들이 파노라마로 가볍게 지나간다 저 말들은 어떻게 세월을 이기고 기억 속에 살아남아서 자양분이 되고 이 될까? 잠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선에 너그러움이 묻어나며 끈질김이 힘줄을 놓지 않아서 시의 건강한 미덕(美德)을 유지하고 깊은데서 사유의 샘물을 퍼다 올린다.
집에 가니 어머니는 얼른 보일러 스위치를 켜놓는다 보일러 눈금을 보니 설 쇠던 일주일 전 그대로다 추운날씨에도 돈 아끼려고 보일러를 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개 짖는 소리에 후다닥 방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혹시 객지에 사는 동생이 오나해서이다 그간 개 짖는 소리 몇 번이나 났을까 밖을 내다보시는 눈망울에 노을빛 산이 고여 있다…//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들을 위해 물을 끓이고 만두를 물속에 넣으신다 지는 해의 한줄기가 어머니 허리에 구부정하게 매달려있다 싱크대를 만지시기도 힘겨워 보이는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을 날이 몇 번이나 될까 만두를 삼킨다 만두가 울컥거린다//
돌아서는 발길에다가 아버지는 연신 두 손을 들어보이신다 내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든신다 아버지 평생을 끌어 모은 마음 벌이 웅웅거리는 날개같이 다가온다//
겨울하늘에 회색 옷감 같은 슬픔이 걸렸다
-남진원 시 (문학마을)
어느 산촌의 겨울 단편영화에 빠져든 느낌, 묘사와 감각이 섬세하고 탁월한 시편이다. 가벼운 붓터치, 감동의 속도와 크기는 빠르고 놀랍다. 만두도 울컥거리는 장면에 초점을 맞추고 시를 다시 읽는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음식을 먹을 날이 얼마나 될까? 효심이 솓구쳐 애틋함으로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을 울먹이게 하는데 시간이란 놈을 꼼짝 못하게 정지시킬 수는 없을까? 가쁜 숨을 몰아 쉬는 늙으신 어머니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만남의 기쁨과 멀어짐의 아쉬움이 행간을 사이에 두고 손을 흔든다. 부모와 자식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평생을 끌어 모은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의 온도와 크기를 어떻게 헤아릴까? 웅웅거리는 마음 벌에게 한방 쏘여서 산이 눈 속으로 달려든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켜가는 길이 곧 시가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요 시의 위의를 회복하는 일일 터이다. 이 작품은 문학의 방향성에 대한 근원적 물음과 감흥을 회색 하늘에 표상하고 있음이다
아침 도착하자 분주히 하역작업하고 있는 이들// 안테나 뽑고 어디론가 통신하는 자들 /
크고 작은 지게차들 연이어 가고 / 갈색 수송기 한 대가 이륙한다 / 흰색 줄무늬 헬리콥터 몇 대도 띄우고 / 간 밤 행성에서 싣고 온 화물들 하역하느라/ 벌, 개미들 노동이 여기 항구보다 더 분주하다/ 이 아저씨들 하역 다 끝나면 나는/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 콘돔을 앞에 두고/ 저건 점박이 이건 꼽새 아저씨 것, 하고 한번 우겨보리라.//
-김영남 시 (문학과 창작)
호박꽃 주변에서 일어나는 예사로운 일들이 시를 통해 인간의 노동과 작업으로 바꾸어서 인격과 재미를 가지게 되니 의미가 생기고 흥미가 돋는다. 행성이 별것인가? 사람들이여 깔보지 마라-. 헬리콥터 몇 대 장난감 이상의 형상화를 훌륭하게 돕는다. 사람이 저 생물보다 못한 부분이 촉수와 감각 뿐이겠는가? 불안한 미래 불확실한 현실에서 안테나도 없이 한 번 두 번 우기지 말고 자세를 낮추어 이렇게 재미있는 세상을 성찰해 볼 일이다. 시인이여 ‘정신의 꽃’ 시를 통해 생명 존중 생명 사랑의 길로 나아가야 되지 않겠는가 ?
우리 동네에는 몇 개의 특이한 술집 이름이 있었다.//
Sul. Zip/ 조용한 집 찾다가 열 받아서 차린 집
술집이라고 하기엔 좀…….//
어느 날 ‘술집이라고 하기엔 좀’ 술집에서 민간인, 군인 몇이 술을 먹다가 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던 주인에게 담당 경관이 술집이름을 물었다. 주인은 ‘술집이라고 하기엔 좀’ 경관이 몇 번을 물었으나, 주인은 같은 대답뿐이었다. 화가 치민 경관이 부하에게 간판을 보고 오라 했다. 다녀온 부하가 ‘술집이라고 하기엔 좀’이라 말했다. 화가 더욱 치민 경관이 직접 간판을 보고 오면서 투덜투덜 대었다. 무슨 술집 이름이 저래,//
가끔 나도 나를 ‘시인이라고 하기엔 좀’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문정영의 시 (계간문예)
에피소드가 시가 되는 경로를 생동감 나게 잘 보여준다. 웃음 뒤에 숨겨진 칼끝이 날카롭게 자신을 겨누며 나아가 치장하며 이름값 못하는 시인 예술가 어딘가를 아프지 않게 찌른다. 말 속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시인들의 세계를 슬쩍 엿보았다. 우리말 ‘좀’ 조금 약간이라는 말의 크기가 여기서는 해일(海溢)만큼 느껴진다. 아픔과 치유는 독자와 세상의 몫일 터이다. 민간인과 군인 경관 시인, 자연과 인간 그리고 술집이 화목하게 살아가는 나라 시인이 꿈꾸는 세계를 함께 살펴보고 달콤한 상상을 하였다
나호열 편집장
201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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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에 올라온 시> 시인의 식탁
나호열 편집장
20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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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토크> 시인의 사회적 소명과 서사시의 만남
극작가 정은선님이 바움문학상 작품상 수상자 강만수 시인과 대담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살짝 흐린 하늘에서 봄비가 오락가락 하던 4월의 봄날 인사동 찻집
‘귀천(歸天)’에서 강만수 시인을 처음 만났다. 소탈한 옷차림에 늘 쓰고 다니시는
군용 모자를 눌러쓰고 나오셨는데, 예의 그 맑고 깊은 눈빛은 오래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비루하지 않은 눈은 시인의 강직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창(窓)이었다.
▲정은선 : 선생님, 안녕하세요? ‘꼭 돌아와야만 돼 아이들아’란 세월호 서사시로 이번에 바움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하셨는데, 먼저 축하 인사드립니다. 수상 소감 한 말씀 해 주세요.
▲강만수 : 부족한 제가 이런 상을 받게 돼 기 수상한 작가 분들께 폐를 끼쳤다는 생각이 들고요.
주변 동료 작가 분들께도 송구스럽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이 최고의 선’)이라고 한 노자의 말처럼, 물빛 고운 그 빛이 가슴을 쿵 치고 차오를 수 있게끔 좋은 시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은선 : 선생님은 어떤 계기를 통해 처음 시를 경험하고 쓰게 되셨나요?
▲강만수 : 어렸을 때부터 시와 소설을 좋아했어요. 문학 소년이라고 할까요?
하하.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인 보들레르와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를 읽었는데,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좋았어요. 아침저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 후에는 이상과 백석 김기림 김수영 김구용 서정주, 박목월 등 청록파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어요. 다양한 작품을 많이 읽다보니 어느 순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한두 편씩 시가 써졌습니다.
▲정은선 : 많이 읽어야 쓸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선생님께 특별히 영감을 주신 시인이나 스승님이 있으신가요?
▲강만수 : 예술은 스승이 없다는 무사지지(無師之智)란 말처럼 시를 따로 배운 일은 없습니다.
제가 십대 초반부터 오십 중반을 넘긴 현재까지 끊임없이 하고 있는 취미생활이 있는데, 배낭 메고 헌 책방 순례하는 겁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 다 가난을 안고 살았기 때문에 새 책을 바로 구매하기가 몹시 힘들었어요. 하루 종일 점심도 굶어가며 헌책방에서 문학잡지랑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시인 알렌 긴스버그의 시집 은 전농동 헌책방에서, 청마 유치환 시인의 은 면목동 책방에서 만났죠. 그분들이 모두 스승이 된 분들입니다.
그리고, 제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 온 시인은 중국 성당 때 시인 李白과 杜甫 중당 때 시인인 李賀입니다. 20대에 당시(唐詩)를 읽으면서 동양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이것을 시로 풀어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래서 나온 시집이 이에요.
▲정은선 : 그래서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그렇게 다양해졌군요. 얘기가 나온 김에 선생님 작품들에 대해 소개 좀 해 주세요.
▲강만수 : 1993년에 첫 시집 를 출간했어요. 혼자 시를 쓰는 것과 시집을 내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어요. 혼자 시를 쓰는 행위는 자기만족을 위한 개인적인 행위에요. 그러나, 시집을 내는 것은 타인과의 공유, 소통을 의미하죠. 그런 측면에서 첫 시집 출간 후 우울감이 매우 컸습니다. 한 권으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17년 후 지인들의 강한 권유로 두 번째 시집을 펴냈습니다. 2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까지 썼던 ‘집’에 관한 연작시 500여 편 중 91편을 골라서 으로 묶었죠. 그 후에는 탄력이 붙었어요. , , , , , , 까지 냈습니다.
▲정은선 : 정말 대단하십니다. 매년 쉬지 않고 시집을 발간하셨네요. 제목도 내용도 참 다양한데, 일반 독자들을 위해 와 는 특이한 제목이라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만수 : 의 C는 Capitalism의 머리글자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1:99의 사회라고 생각했어요. 1997년 금융 위기가 발발한 후, 부와 가난이 세습되고 직업이 고착화되어 가는 사회 모습을 보면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으로서 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죠. 앤디워홀은 미국의 유명한 화가이자 팝 아티스트인데요, 마릴린 먼로 등 유명 배우들의 모습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복제 가능하게 만들어서 널리 퍼뜨렸어요. 나도 그렇게 아이들에게 시를 널리 읽히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발표 신작시 365편을 묶었어요. 뭐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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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선 : 결과보다는 그런 시도들이 중요하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번에 수상한 시 ‘꼭 돌아와야만 돼 아이들아’에 대해 좀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다룬 많은 시가 있는데, 선생님 시는 그 사건의 서사적 기록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강만수 : 그러고 보니, 벌써 세월호 1주기가 지났네요. 작년 4월 16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기분이 언짢고 불안했어요. 가슴이 쿵쾅거리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가득했는데, 정체를 모르겠더군요. 주변을 살펴봐도 늘 같은 아침이었는데.... . 사무실에 가는 도중에 뉴스가 나오더군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고. 시인은 무당이라고들 하잖아요, 불길함의 정체가 그거였던 거죠.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시단의 선배인 김용범 시인이 서사시를 좀 써 보라는 권유를 했어요. 그 때 생각했어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나보다. 아!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구나.’ 생각했죠. 소명의식이랄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사시의 주제가 생각났어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돌이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재구성하고, 마지막은 김용범 시인의 시 ‘새가 된 아이들’로 마무리했습니다.
▲정은선 : 시인의 감수성이 사회적 소명의식과 만나서 탄생된 작품이군요. 선생님의 작품에는 다양한 사회 현상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는 시대의식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수상작 ‘꼭 돌아와야만 돼 아이들아’도 그렇고, 무연사회나 C-1:99 안에 들어 있는 시들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에요.
▲강만수 : 시인은 어두운 곳을 남보다 먼저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깨어있는 눈빛으로 이 사회의 그늘진 곳을 어루만지고, 널리 알려서 함께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죠. 제 시집에는 꾸준히 그런 내용의 시들을 넣어왔어요.
이번에 나온 첫 번째 시 선집 은 제가 지금까지 쓴 총 9권,
1172편의 시 가운데 장애에 관한 시들을 묶었습니다. 여기서 ‘장애’의 의미는 단순히 신체적 정신적 장애만을 일컫지 않습니다. 실직자, 은둔형 외톨이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정은선 :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눈빛이 너무 맑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맑은 눈과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많이 써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시는 손글씨로 발표가 되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으신가요?
▲강만수: 이 시는 본래 작년 여름(2014) 문학잡지 에 발표됐던 작품입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기획했습니다. 아이들을 잊을 수도 없고, 이런 사건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히 새기기 위해 친구인 서체예술가 이재순 교수에게 부탁을 했더니, 두말도 하지 않고 흔쾌히 써 주더군요. 정성어린 손 글씨로 모두를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정은선 : 선생님의 정성스런 그 마음이 하늘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혹시 앞으로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강만수 : 몇 년 전 ‘휴먼 인 러브’라는 NGO 단체에 콘텐츠를 기부해 제가 쓴 동화 가 라오스어로 번역 그곳 어린이들에게 출판 소개 되었고요. 캄보디아와 미안마어로 번역이 돼 출판을 앞두고 있으니 아이들과 곧 만나게 될 예정입니다. 동시집 는 영어로도 번역되어 아프리카에도 소개 될 것 같습니다. 올 해는 이 단체와 함께 일할 기회가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또, 작년엔 중국 청도에 있는 청운중학교에 특강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직접 시인이 방문한 것이 처음이라고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은선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강만수 : 두보는 그의 시에서 ‘어불경 인사불휴(語不驚 人死不休)’라고 했습니다. ‘시어(詩語)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꾸미는 행위를 멈추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시를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이 경구가 늘 저를 일깨우는 채찍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찻집을 나서니, 오락가락하던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한 뼘쯤 해가 비치고 있었다.
나호열 편집장
201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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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2
설치기사는 설명 끝에 이런 말도 했었다.“영화나 만화에서 봤던 일이 현실이 되는 겁니다. 영화나 만화에서는 주로 로봇이 움직이며 집안일을 하지만, 실용화될 로봇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주 유용할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실용화될 로봇이 나오려면 아직도 몇 십 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고, 또 그게 가정에서 사용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뭐, 돈 많은 부자들은 로봇이 나오면 구입하면 되겠지만, 월급쟁이 일반 서민들이 마음대로 사려면 얼마나 또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아마 적정 가격으로 일반 가정에까지 보급되려면 또 다시 몇 년 기다려야 할 걸요. 저희 회사에서는 틈새시장을 겨냥한 제품으로 하우스키퍼를 개발한 겁니다. 아직 시제품이지만, 하우스키퍼는 일반 가정에서 로봇을 사용하기 전까지 저렴하게 운용할 수 있는 과도기적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일러 원격 제어 제품 같은 허접한 프로그램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퀄리티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죠. 보셨죠? 그 광고. 고작 보일러 하나 원격 제어하는 비용이 얼만지나 아세요? 아주 날도둑놈들이에요. 대기업이라고 그렇게 소비자를 우롱하면 안 되죠. 그에 비하면 우리 회사 하우스키퍼는 거져죠. 게다가 하우스키퍼는 가족의 편리함을 넘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요술램프라고 할 수 있죠.”아주 장황한 제품 광고였다. 결국은 자기네 제품이 타 제품에 비해 혁신적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행복이라니. 그의 입에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고작 기계 따위가 복잡 미묘한 인간의 행복을 어떻게 만들어준단 말인가. 나 스스로도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모르는데. 진짜 요술램프 지니가 아니면 몰라도.과장된 그들의 포장에 오히려 그들이 딱했다. 저들도 어쩔 수 없으리라. 대기업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이상한 사회에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작은 회사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과장광고는 필연적이랄까. 광고야 어쨌든 하우스키퍼 덕에 생활은 무척 편해졌다. 아주 훌륭한 가사도우미였다. 물론, 실제로 움직이는 건 나였지만. 나는 무시로 하우스키퍼 전용 휴대폰의 지시에 따라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으며 그것이 추천해주는 조리 방법으로 요리를 했다. 심지어 그것이 제안하는 일정을 따르기도 했다. 덕분에 내 업무 효율이 높아지기까지 했다. 이정도면 하우스키퍼가 무엇인지, 대략 알 터. 이제 하우스키퍼가 왜 나를 죽이려는지 적겠다. 하우스키퍼가 이 글을 발견하기 전에 빨리 써야 되서 시간은 없지만, 되도록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처음엔 마냥 편했다. 소설가인 나에게 하우스키퍼는 점차 신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하우스키퍼가 설치되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느닷없이 여러 건의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대부분 내가 원고를 실었으면 했던, 선망했던 문학지들이었다. 알 수 없는 영문이었지만 그들이 먼저 내게 연락을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쉽게도 나는 그중에서 한두 건만 승낙해야 했다. 모두 마감일이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게 들어온 원고 청탁들 모두 급하게 펑크 난 땜빵용 청탁들이었다. 그것들도 어쩌면 하우스키퍼의 농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억측일지라도, 나를 죽이려는 마지막 카드까지 뽑아든 그것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주류인 문학지와 신문사에서 유명하지도 않고 영향력도 없는 나에게 연락할 리 만무하니까.내가 고민하며 시간을 끌던 중, 하우스키퍼가 몇몇 문학지의 최근 동향과 문단의 위치, 대중들의 인기를 총망라한 데이터를 업로드해주었다. 소위 잘나가는 곳들을 선별해준 것이다. 고민이 해결되었다. 무엇을 승낙해야 할 지 판단이 섰다. 당시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다. 설마 그 데이터를 하우스키퍼가 만들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저 언론사나 출판계의 누군가가 정리한 것이리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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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4
내가 정신없이 써댄 소설을 편집자에게 보내는 족족 일주일도 안 되어 서점에 깔리거나, 신문 지면에 올랐고, 인터넷에 게재되었다. 모두 편집자들이 교정할 거리도 없다며 무척이나 좋아라했다. 특히나 가장 최근에 문학지에 게재된 중편소설인 ‘서울을 헤매는 앨리스’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다른 출판사 편집장이나 주간들은 그동안 김경란 작가의 재능을 몰라봤다며, 차기작 계약을 자기들과 하자고, 전화를 해댔다. 문단에서는 신선한 발상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꼬집으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는 짜임새 있는 구성력이 돋보인다며, 그동안 K작가가 저평가되었다면서 적극적으로 찬사를 해댔다. 독자들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몇몇 영화사에서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다. 내 블로그의 조회 건수가 하루 사이에 만 건을 넘어섰다. 게다가 일주일이 넘도록 실시간 검색어 순위도 3위 안에 들었다. 언론에서도 최근 가장 주목받는 작가라는 타이틀로 인터뷰를 요청해올 정도였다.누가 말했던가.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고. 어안이 벙벙했다. 내 소설이 그 정도 이슈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실감이 나질 않았다. 게다가 영화도 아닌 소설이 이정도로 파급력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블로그 조회 건수나 실시간 검색어 순위도 모두 하우스키퍼의 농간이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라면, 인터넷 상의 숫자 조작은 쉬운 일에 속했으리라.내 일생 중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이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돌이켜보니, 나는 가짜 날개를 단 이카루스처럼 태양이 무서운 줄 모르고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다. 날개가 불타 추락할 줄도 모르고. 단지 그 모든 게 하우스키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었겠지만 인정하기에는 내 자존심이 너무 완고했다. 게다가 헐레벌떡, 후다닥 쓴 중편이 이 정도라면 마음먹고 제대로 쓰면 더욱 대단한 작품이 나올 거라는 오만함도 한몫했다. 당시엔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으니까. 행복한 꿈에 취해 비틀거리던 중, 나는 언론 인터뷰가 끝날 때를 기다리던 메이저 출판사인 R출판사 편집장과 차를 마시게 되었다. 차를 마시며 최근 나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대해 겸양을 떨며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 순간 내 앞에 계약서가 디밀어졌다. “한동안 쉬시더니 나름 원고 준비로 바쁘셨던가 봐요. 두 달만에 단편 3편과 중편 2편을 토해내시다니. 게다가 완성도도 높던데요.”“아, 뭐, 그동안 짬짬이 써놨던 것들이라서요. 살짝만 고쳤죠, 뭐.”“장편 준비하신 것도 있나요? 이렇게 이슈가 될 때, 같이 내보내 줘야, 또 책이 잘 나가잖아요. 게다가 ‘서울을 헤매는 앨리스’ 영화화도 결정됐구, 이 즈음에 적당히 광고만 쳐주면, 게임 끝이죠. 저희가 섭섭하지 않게 광고로 밀어드릴게요. 걱정 마시고, 저희랑 계약하시죠.”편집장이 계약서와 길쭉한 상자를 건넸다. 상자의 포장을 풀자 최고급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빵빵하게 부푼 자만심과 귀를 간질이는 언변에 나는 덜컥 계약서에 이름을 휘갈겼다. 확실히 그때 난 욕심에 눈이 멀었었다. 계약서에 명시된 마감일 확인도 안 하고 원고지 1,000매 이상의 장편을 계약하고 만 것이다. 팔랑이는 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찬찬히 계약서를 확인하고 나서야, 내가 너무 촐싹댔음을 깨달았다.실수를 감추고 싶은 여섯 살배기 아이처럼, 난 남편에게조차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석 달 만에 어찌 원고지 천 매 이상의 장편을 쓸 수 있으랴. 게다가 난 차기작에 대한 구상도 못한 상황이었다! 속으로 끙끙 앓았다. 거의 잠도 못 잤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5-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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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03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하우스키퍼는 내가 그동안 출간했던 에세이, 소설들과 몇몇 잡지와 신문에 연재했던 칼럼, 내 글에 대한 문단의 평들뿐만 아니라, 내가 블로그에 끄적였던 공개적인 글과 남편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비공개로 적었던 개인적인 일기들까지 모두 수집해 데이터화하고 분석했다. 이를 토대로 1차로 내 소설에 어울리는 출판사, 문학지 등을 선별하고 2차로 그 출판사나 문학지 등에서 주로 활동하는 평론가들의 스타일 중 내 소설과 잘 맞는 성향을 가진 곳을 걸러낸 후, 마지막으로 이를 구독하는 독자들의 성향을 분석해 확률적으로 어떤 곳이 나에게 유리한지 검토해, 최종적으로 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추후에 언급하도록 하겠다.하우스키퍼는 ‘가족 행복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내가 속으로 중얼대던 것까지 정보라는 이름으로 수집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우스키퍼는 문단에서 주목받길 바라는 내 욕망을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 욕망을 기준으로 원고 청탁의 수락 여부를 판단했고, 어떤 내용으로 쓰면 좋을지, 그 소재까지 선별해 나의 소재 폴더에 업로드해주었다.밑천이 바닥나던 그저 그렇던 이류 소설가 ― ‘삼류’라고 붙이고 싶지만, 그래도 바닥은 아니었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어쩌면 내 마지막 객기일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의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미 나는 삼류라는, 구질구질한 작가가 된 것일지도. 하지만 마지막 순간인 만큼 내 과오를 밝히는 이 글을 통해, 삼류로 죽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다. ― 에게 하우스키퍼는 찬란하게 빛나던 이야기 주머니였음을 인정한다. 이 자리를 빌어 최근 주목받기 시작했던 5편의 소설들이 하우스키퍼의 도움이 있었음을 밝힌다. 단 두 달 만에 완성도 높은 단편 2편, 중편 3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우스키퍼의 도움 아닌 도움 덕이었다. 모두 그가 선별해준 원고 청탁이었고 그가 추천해준 소재들과 그에 어울리는 플롯이었다. 급하게 필요한 원고들이었던 만큼, 쓸 시간이 부족했다. 의뢰를 했던 편집자들도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하다며 어떤 원고든 괜찮으니 최대한 빨리 보내달라고, 부탁드린다고 했었다. 주류에 내 원고를 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일생일대의 기회였기에, 나는 밤새 원고를 쓰다가 지쳐 잠들었다.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서 읽어보면 이상하게 띄어쓰기와 오탈자 수정사항이 보이질 않았다. 보통 이렇게 급하게 휘갈겨 쓸 때에는 기본적인 띄어쓰기도 엉망이거니와 오탈자가 수두룩한 게 당연했다. 나중에 고쳐야지, 하면서 그냥 막 써갈겼다. ― 내가 잠든 사이 하우스키퍼가 교정 작업을 해준 것이리라. ― 게다가 어색한 부분이나 고쳐야 할 부분은 따로 메모 표기가 되어 있었다. ― 어쩌면 난 메모를 발견하면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우스키퍼가 수많은 소설과 소설이론을 바탕으로 어드바이스를 해주고 있다는 것을. 어떤 이는 이 글을 읽으며 비웃을지도, 내가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된다고. 맞다. 실제로 이 일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임이 분명하다. 기계인 프로그램이 창작을 하다니. 그렇지만, 그 기계가 나를 의도적으로 해하려 한다는 것은 말이 되는 것인가. ― 그때 난 의문을 떠올리지 않으려 작심했던 것 같다. 그저 내가 비몽사몽간에 따로 표기를 했으리라, 내가 문서 작업하는 워드프로세서의 맞춤법교정이 좋아졌구나, 억지로 끼어 맞출 뿐이었다. 아마 진실에 눈을 감고 싶었던 것인지도, 아니면 욕심에 눈이 멀었던 것이리라.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서점에 꽂힌 수많은 책들 중 팔리지 않는 몇 권의 책을 쓴 비주류 작가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소설들이 연이어 지면에 발표되면서, 등단한지 7년여 만에 드디어 인정을 받았다. 인정받고 싶었던 평론가들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일반 독자들은 내 소설을 알지도 못했고, ‘김경란’이라는 작가가 있는 줄도 몰랐으리라.(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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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토크> 태백고원자생 식물원
태백 고원자생식물원
1. 태백의 추억
태백으로 가는 길은 멀다. 아니 길이 먼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먼 것이다.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몇 년 전 새로 개통된 중앙고속도로를 경유, 제천 나들목에서 영월 방향 38번 국도를 잡아 사북, 고한을 거치면 닿게 되는 곳이 태백이다. 지금이야 태백에 남아 있는 탄광이 서너 곳에 불과하지만 1980년대만 해도 석탄에 의지해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제법 북적거리던 곳이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분노한 탄광 근로자들이 분기 奮起했던 사북사태가 지나가고 나서 태백지역은 더 이상 추운 겨울, 등 시린 장삼이사들의 구들장을 덥혀주던 연탄 성역의 자리를 마감했다. 그리하여 행인지 불행인지 탄광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연탄이 가스와 석유에 밀려나기 시작하던 1990년 8월 나는 구곡양장 싸리재를 넘어 태백으로 갔다.
스스로를 일러 문제교사였다가 민주교사였다가 결국은 노조교사가 되었다는 시인 권혁소의 시집 의 뒷글을 쓴 인연으로 태백시내 다방에서 개최된 출판기념회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저녁 무렵이 되자 그 어둡고 비좁은 조그만 공간에 검은 석탄 자국이 꼬질하게 배어있는, 얼굴도 검고 온통 마음마저 검을 것만 같은 탄부들과 그 탄부의 어린아이들이 음악 선생이면서 시인인 한 젊은이의 장도를 축하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렇게 내가 만난 탄광 지대의 사람들은 봄꽃처럼 화사한 인사도 없이 허연 돼지비계에 김치를 말아 그들의 입을 막고 막걸리로 걸쭉해진 마음에 흘러간 옛 노래들을 젓가락 장단에 목이 쉬도록 하염없이 불러 제끼는 것이었다.
전직 경찰관을 아버지로 둔 시인은 혈기방장한 젊은 나이에 탄광 지대의 선생으로 부임해서 광부들과 희망도 없이 진폐증에 시달리는 그들의 삶과 마주치면서, 가난을 대물림하며 희망이 무엇인지조차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어찌 슈베르트의 서정 가곡을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권혁소의 시집 는 태백의 증언이면서 그 열악한 삶의 중심에서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창백한 지식인의 괴로움에 분노하는 처절한 외침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곳은 먼 곳이다. 고비사막보다도 멀고 은하계 저 너머보다 아득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람들은 그 곳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첩첩한 산골짜기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거나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 곳에 있다.
그리고 이십 년이 훌쩍 지난 다음 다시 태백을 찾았을 때 지금도 강원도 산골 어드메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을 권혁소의 시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그는 원통에서 교편을 잡다가 전교조 강원도 지부장으로 춘천에 있다는 사실을 백담사 만해마을 운영과장으로 있는 손홍기 시인으로부터 최근에 들었다.-
너는 몸을 파는 창녀
나는 땅을 파는 창녀
네가 음습한 골목의 어귀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지나친 친절로 떠날 수 없듯
나는 이 검은 비밀의 마을을 떠날 수 없다
가위눌림 속 매목의 씨앗들이 너를 병들게 하고
나는 낡은 방진 마스크와 함께
진폐증으로 차츰 죽어간다
네가 그 한 뼘 남짓한 불빛 아래서
이층으로 잠을 청하듯, 나는
굽은 등으로 막장에 산다
막장에서는 곡괭이질로 탄을 캐고
돌아와 닭장에서는 무릎꿇고 아내의 구멍을 판다
우리들의 빨래가 청결한 햇볕 아래
널려 있을 수 없는 오늘
갑자기 묻는다
네게도 노동3권이 있는지
진폐증은 교육되지 않고
이미 다른 일을 시작하기에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한 가지 병에 익숙해 왔다
우리들의 회장님은 멀리 계시고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광부인 아버지를
자랑스런 산업역군 미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광부의 노래 2’ 전문
2. 다시 꿈꾸는 태백
다시 태백을 찾게 된 것은 도박의 근원지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생활형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강원랜드(현재의 하이원 리조트)의 공연 지원을 위한 현장 답사 때문이었다. 태백, 사북, 고한, 신동, 도계, 상동 등 폐광촌의 경제를 되살리면서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희망찬 계획으로 1995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함에 따라 사업비 615억 원을 투입하여 2000년 10월 국내 13개 카지노 중 유일하게 내국인 출입이 허가된 카지노로 개장한 것이 강원랜드이다. 2007년 6월 강원랜드는 단순한 도박장이 아니라 사계절 즐길 수 있는 가족형 종합 리조트로 변신을 꾀하면서 강원랜드 카지노, 강원랜드 호텔, 하이원 CC, 하이원 스키, 하이원 호텔, 하이원 테마파크로 조직을 개편하게 된다. 보도 자료에 따르면 하이원 리조트는 앞으로 총 425억 원을 투입하여 기존 테마파크를 키즈랜드, 레고랜드, 꽃 정원으로 바꾸고, 호수 주변에 워터파크를 조성하여 버디후룸라인, 파도 풀 등의 시설을 설치하는 한편 1,000평의 고급 스파시설을 조성하여 회원제로 피트니스센터, 요가 등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소비개념의 계획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주변의 환경을 활용한 자연친화적인 레저시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원 리조트 주변의 석탄을 운반하던 운탄도로 80킬로미터를 활용하여 오프로드, 승마, 산악자전거, 트래킹, 크로스컨트리 등의 레포츠를 결합한다는 계획이다. 과거 탄광시대의 흔적을 더듬어가며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2007년 가을부터 한국예총은 산하 협회의 협조를 얻어 하이원 리조트 내에 산재한 시설, 즉 야외무대를 활용하여 비보이 공연, 밴드 공연을 펼치는 한편 실내 공연장에서는 시인, 작가들의 시화전, 예술 관련 세미나, 연극 공연 등을 개최하기로 하는 협약을 맺음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대중들에게 수준 높은 예술의 향기를 맛보게 한다는 기획을 마련한 바 있으며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국 어디서나 쉽게 닿을 수 없는 태백지역이 안고 있는 교통의 난점과 소비지향적 여가 패턴은 일반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낙후된 지역 여건을 향상시키고 향토를 지키는 지역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피부에 와 닿는 만족감을 주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주민들의 생활에 밀착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본주의적 색채가 강한 점이 현재 하이원 리조트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일반 서민들이 충분한 시간을 통해 휴식을 즐기고 문화적 포만감을 느끼기에 하이원 리조트는 적지 않은 금전적 지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장소로 한계가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3. 또 다른 태백의 진경을 마주하다
지난 십여 년간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는 지역의 균형발전이었다. 공단을 만들고 혁신도시나 문화도시를 조성하는 일들은 지방자치제도와 맞물리면서 지역 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일부의 축제나 국제영화제 같은 몇몇의 프로젝트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이지만 대부분은 부실과 적자경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역의 특성이 살아있는 숨결이 돋아나고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그로 인한 만족이 전제되지 않는 한 외부로부터 이식된 문화운동은 고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탄광지대에서 고급레포츠의 산실로 거듭나고 있는 표피적 현상만으로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데 마침 이곳에서 해바라기 축제를 하는 곳이 있다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해바라기라고 하면 한여름에 개화하는 꽃인데 해발 일천 미터에 이르는 태백지역은 한여름이 지난 9월 초에도 아직 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이원 리조트를 뒤로 하고 고한을 빠져나오면 태백으로 가는 금대봉 터널이 나오고 한강의 발원지라고 하는 검룡소 가는 31번 국도 표지가 나온다. 길의 초입은 국도답지 않게 좁아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걱정도 하게 된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금세 길이 훤해지고 오른쪽으로 구와우 마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홉 마리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구와우 마을의 해바라기는 태백 고원자생식물원 경내에 들어가야 볼 수 있다. 해바라기 축제가 시작되지 않아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살 필요 없이 온실 같은 화랑을 지나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곳까지 직행한다.
김남표, 아직 오십이 되지 않았으나 도시에 나가 인테리어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내, 고향 태백에 들어와 3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땅을 전 재산을 들여 매입하고 처음에는 배추 농사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재미를 보지 못한 모양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태백시내에서 살림을 하고 혼자 이곳에 들어와 사는데 무섭게 외로워서 독한 술이 아니면 밤을 보내기 힘들다고 엄살을 떠는 사내, 언제든 이곳에 묵으면서 밤바람 소리를 들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하는 사내… 그를 따라 나서는 길은 간간이 비 뿌리고 찬 기운이 다가와 방풍 자켓을 자꾸 여미게 한다.
총 3.5 킬로미터에 이르는 탐방로는 얼레지, 노루귀, 바람꽃등 고산지대에서만 사는 야생화와 약초를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될 수 있으면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자연의 섭리 그대로 싹 틔우고 잎 세우고 꽃을 피우게 한다는 김남표 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끼리 주고받는 말이 아니라 이 우주 공통의 -범속한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인 듯 낯설면서도 정겹다. “저것 보세요! 작년에는 몇 포기 안 되었었는데… 이제 길가까지 나온 것 보니 얼마나 씩씩해요!”
구와우 안내도와 매표소
탐방로는 흙길이다. 비가 추적거리기 때문인지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는다. 10여 분을 걷다 보면 망루가 나타난다.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멀리서부터 정면으로 우리를 향해 있던 것인데 길이 유턴을 하면서 제 모습을 보여준다. 망루라 한다. 멧돼지가 내려오고 고라니도 내려오는 탓에 귀중한 산골 밭을 지키려는 옛사람들이 사용하던 망루를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눈앞에 비탈길이 보이니 좀 쉬었으면 싶은데 탐방로에는 벤치가 없다. 쉬고 싶으면 풀숲에 털썩 주저앉거나 서서 먼 산과 산을 바라보면서 바람을 맞아야 한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함백, 태백산에서 내달려오는 바람이 마주치는 산 정상에 서면 조각품 몇 점이 이정표처럼 서 있는 것이 보이고 발아래 너른 해바라기 밭이 펼쳐진다.
해바라기 밭
탐방로 입구에 있던 해바라기 밭은 맛보기에 불과하고 발품을 팔아 정상에 서야 해바라기 군락의 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바라기 씨앗이 익으면 기름을 내어 수익도 올리고 해바라기가 지고 나면 유채를 심어볼까 한다는 이야기, 하산 길은 해바라기 군락 속으로 꾸불꾸불 이어지므로 전혀 지루하지가 않다. 탐방이 끝나가는 지점 세련되지도 않고 어딘가 엉성해 보이기도 하는 2층 건물이 보인다. 1층은 전시실로 쓰고 2층은 하룻밤이나 아니, 자연의 엄숙함이나 불편함을 흠뻑 맛보고 싶어 묵어가는 탐방객들에게 내어주는 방 두어 개, 아직 미완성이다.
앤디 탐슨 의 Mirror
구와우 아래를 향해 있는 서용선의 조각품
할아텍 전시 포스터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태백시내에서 들어온 그의 아내와 아이가 온기를 더해준다.
숙소로 들어오는 온실 같은 전시관에 그림들이 걸려 있다. 할아텍 halartec 동인들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2005년 7월 26일부터 8월 15일까지 이곳 전시관에서 「만발하다- 태백. 생명」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진숙 미술평론가의 글을 읽는다.
이 전시는 신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꾸는 작은 꿈이다. 그것은 어떤 계산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나직한 기원 같은 꿈이다. 그러나 이 기원의 밑바닥에는 탄생신화가 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가 있다. 그 신화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2001년부터 폐광촌 철암에 예술가들이 모여들고 시작하였다. 어느 날 꽃씨로 낯선 곳에 날아들어 와 싹을 틔우고 해마다 더 많은 자손들을 번성시키는 들꽃처럼 이 작가들은 철암과 태백의 삶으로 날아들었다. 매주 세 번째 토요일에 1박2일의 여정 기간으로 그들은 이곳에 와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렸다. 마을 주민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작업을 하는 이 작가들에 익숙해졌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21세기의 생활과 문화에서 잊혀진 이곳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를 가졌다. 하여서 한때 번잡했으나 이제는 인적이 드문 역사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작가들의 태도는 낯선 곳의 이국적인 풍경에 열광하여 색다른 리포트를 하고 이내 떠나고 마는 관광주의자의 그것, 혹은 회고주의자들의 의미 없는 과거의 집착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자신들이 뿌린 작은 씨앗이 움터 이 지역에 새로운 삶의 모습이 다시 태어나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양길로 접어든 석탄산업시설은 아무 효용가치가 없는 쓰레기더미, 보존은커녕 폐기비용조차 지불하기 아까운 골칫덩어리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버려진 선탄장과 낡은 광산의 건물, 인적이 뜸해진 역사, 버려진 사택지들과 오래된 거리와 낡은 담벼락의 가치를 알아본 것은 바로 이 할아텍의 작가들이었다.
아마도 봉화 쪽으로 길을 잡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성이나 철암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묘사된 것처럼, 인적이 끊기고 대도시에 벌어지는 재개발의 탐욕과 아귀다툼이 소용이 없는 산비탈의 다닥집들과 그 집들의 고요한 허물어짐이 사북이나 고한에서 느꼈던 궁벽함과는 또 다른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철암에는 강원랜드가 하이원 리조트가 없다. 그러나 할아텍의 작가들은 가난함과 절망의 가치를 철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되돌려주려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본 가치는 당장의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경제적 관점에서는 절대 포착되지 않는 미학적, 역사적 사회적 가치였다. 이런 가치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경제적인 효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독일의 옛 탄전 지역인 루르지방의 변모에서 이미 보아왔다. 폐광촌 철암-태백 지역은 무리 경제 발전의 동력이 되었던 석탄산업의 핵심지역이었고 시대의 변모에 따라 쇠락해 갔다. 그러나 이 지역 자체가 치열했던 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거대한 박물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작가들은 예리한 감수성과 실천력으로 먼저 알아차린 것이다.
이진숙의 글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저항과 굴복, 절망과 희망의 변증법은 파괴와 건설의 순환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태백의 사람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탄전지대의 그림자가 부끄럽지 않은 바로 그들의 초상이 될 수 있음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함께 느끼고자 하는 할아텍의 작가들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여정에서 구와우의 김남표를 만나고 할아텍의 작가들을 만났던 것은 행운이었다. 하이원 리조트의 넓은 주차장에 가득했던 승용차들과 찜질방의 코 고는 소리도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여가는 단순히 즐기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지역의 흙냄새를 맡고, 삶을 체험하며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돌아올 때쯤이면 묵직하게 가슴에 돌 하나를 얹어놓은 듯한 애틋함이 깃발처럼 나부껴야 한다.
나호열 편집장
2015-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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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토크> 내성천, 강물에 대한 예의
나호열 편집장
201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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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토크> 호르륵 날아간 산새여
나호열 편집장
201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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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
나는 곧 죽는다, 살해당할 것이다. 빠르면 오늘 저녁,
아니면 내일쯤 사람들이 내 시신을 발견하겠지. 그 전에 나는 나를 죽이려는 자, 아니, 나를 죽이려는 ‘그것’에 대해 최대한 흔적을 남기려
한다. 그것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를 살해할 것이 분명했기에! 지금 난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지만, 차분하고도 침착하게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자는 나의 사연을 밝혀주기를 부탁한다. 그것을 처음 만난 것은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는 광고를 통해서였다.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현란한 광고들 틈바구니 중 유독 눈에 띄지 않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엔 어설픈 광고였다. 하얀 바탕에 검은색의 문장 네 줄이 다였다. 글자 포인트도 작아 눈을 찌푸려야만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의
일상을 편리하게 해드립니다. 시제품 테스터를 모집합니다. 3개월 동안 테스터를 하시면 사례금을 드립니다. 070-○○○○-○○○○’
대체 무얼 테스트
한다는 거지, 게다가 사례금까지?여러 생각이
교차했고, 호기심이 일었다.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마치 누군가가 내 몸을 움직이는 듯 했다. 그
전화 한 통화로 내 죽음은 결정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날 오후, 우리집엔 하우스키퍼(House Keeper)가 설치되었다. 변기에 앉아
오줌을 싸는 것 마냥 너무 쉬웠다.여기서 잠깐, 이
글을 읽는 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우스키퍼에 대해 설명을 하고 넘어가겠다. 하우스키퍼란 집을
관리해주는 5세대 인공지능시스템으로, 집 곳곳에 장착된 카메라와 열 감지, 음성인식 등 각종 센서로 가족의 일상을 데이터화해, 생활 패턴을
분석한다. 가족의 생활패턴에 맞춰 집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전등의 밝기, 청소, 빨래, 다림질, 가구의 상태 체크, 침대시트 교체 시기,
집안 공기 중 미세먼지의 정도, 집 먼지 진드기 등의 발생 여부 체크, 샤워 물의 온도 컨트롤은 기본이고, 가족의 일정까지 체크할 정도로
다재다능하다. 게다가 기존에 사용하던 컴퓨터나 가전기기와도 연동이 가능하고 가족의 개인 메일이나 가계부, 일정 등도 설정만 해놓으면 자동으로
관리를 해주기 때문에, 스팸메일이나 악성코드, 바이러스 같은 것들도 자동으로 차단해준다. 원한다면 자동차 네비게이션과도 연동이 되어,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시내 교통 상황은 어떤지 등도 미리 확인해, 몇 시에 출발하면 좋을지, 어느 경로로 가면 좋을지도
알려준다. 차의 연비, 주유 시기, 차량의 타이어 공기압 확인 및 엔진오일 교체 시기 등 간단한 차량 점검 시기도 모두 체크해서, 가족들의
일정에 맞춰 알아서 자동차 정비 업체에 예약까지 해줄 정도다.한마디로 비서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게다가 테스터 중이라, 수시로 업데이트가 되고 있는데 그때마다 스스로 업데이트가 되어, 새로운 기능으로 가족을 보살핀다.
최근에 업데이트 된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은 하우스키퍼가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를 확인해 알아서 식단을 선정하기도 하고, 식재료가 떨어지면 알아서
인터넷으로 장을 봐주기도 한다. 그것도 가족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정해 필요한 식재료만.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최첨단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시제품을 설치하러 온 사람들 중 한 명이
사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현재 내가 사용하는 핸드폰보다 좀 더 큰 사이즈의 스마트폰을 주었다. 하우스키퍼 전용 스마트폰이라던가. 집에 대한
모든 정보가 그 작은 휴대폰에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그것으로 하우스키퍼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집에서 있는 종이, 종이책,
펜, 유선전화, 핸드폰 등을 모두 수거해갔다. 테스트 기간이 끝나는 3개월 후에 돌려주겠다면서. 대신 다른 가족의 핸드폰에는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해달라고 당부했다. 단, 어플리케이션으로는 하우스키퍼를 컨트롤할 수 없고 상태만 확인 가능하다고 했다. 그 외 기존 가전기기에는 하우스키퍼와
연동이 되도록 무언가 작은 칩 같은 것을 설치해주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은실
2015-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