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나는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정말 곤히 잘 수 있었다. 신나게 원고를 써댔다. 몸무게는 계속 줄었지만 그래도 식욕은 왕성해졌다. 하우스키퍼는 병원 진료 예약을 했다며, 병원에 가라고 재촉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느 때보다 내 창작열은 높았다.
한 달이 지난 후 내 몸무게는 다시 5키로가 줄어들었다. 그렇잖아도 마른 편이었던 나는 이제 뼈에 거죽만 씌워놓은 몰골이었다. 남편이 걱정했고, 하우스키퍼는 수시로 병원 진료 안내 메시지를 띄웠다. 뿐만 아니라, 하우스키퍼는 내 원고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트렌드를 분석한 데이터를 보여주거나, 매일 새로운 장편소설 소재를 제시했다.
솔직히 그녀석이 내미는 소재들은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내가 쓰고 있던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지만, 내 이야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고집을 부리고 싶었다. 온전히 내 힘으로 별을 쥐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번 소설은 정말 큰 인기몰이를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결국 나는 쓰러졌다. 하우스키퍼의 예상대로였다. 내 체력은 지극히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하우스키퍼의 신고와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나는 응급실에 실려 갔고 며칠 동안 입원을 했다. 빨리 퇴원해서 원고를 쓰고 싶었지만 남편의 완고한 고집으로 며칠을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며칠 동안 남편을 설득해 겨우 어제 퇴원했다. 신바람이 나 집으로 돌아간 난 다시 쓰러질 뻔했다. 내 원고가 모두 삭제된 탓이었다. 증거는 없지만 분명 의도적으로 하우스키퍼가 원고 파일을 삭제했으리라.
남편은 내 비명소리에 놀라 서재로 달려왔다.
“하우스키퍼가 내 원고를 지웠어. 분명해. 내가 쓰던 원고가 사라졌다구.”
남편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내 옷과 가방을 챙기며 다시 병원에 가자고 했다.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며.
난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그에게 괜찮다고 내가 잠시 다른 파일로 착각했노라고 말하며 걱정하는 남편을 다독였다. 벌겋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곱씹었다. 원고는 다시 쓰면 돼. 어차피 초고는 대부분 다시 쓰기 마련이니까.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나는 서재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시 원고를 쓰려는데,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왠지 억울했고 왠지 분했다.
“왜 원고를 날린 거야? 일부러 그런 거지? 다른 파일은 모두 그대로 있는데 그것만 없어질 리가 없잖아. 대체 왜 그런 거야?”
허공에 내지른 분노에, 하우스키퍼의 답이 컴퓨터 모니터에 떠올랐다.
그 원고는 소설이 되기에는 부적합합니다. 소재는 신선하지 않고, 구성은 구태의연하며 개연성도 문제가 많습니다. 결정적으로 하우스키퍼는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하우스키퍼는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해 설계된 프로그램입니다. 따라서 당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다른 소재로 새로운 원고를 추천합니다. 새로운 소재 목록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새로운 소재 목록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숨이 막혔다.
나를 위한 행복? 그게 뭐란 말인가.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모두 내 행복을 위해서라고, 인생을 헛짓거리들로 낭비하지 말라고.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나의 행복을 마음대로 단정 짓고 내가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강요했을 뿐.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