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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08-부마도위(駙馬都尉) 신익성(申翊聖)
  • 기사등록 2017-06-27 09:57:51
  • 수정 2017-07-14 14: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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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08-부마도위(駙馬都尉) 신익성(申翊聖)


그림 : 중천 김창현

어느날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옥관자(玉冠子)가 붙은 망건을 벗어서 옹주(翁主; 선조의 딸, 貞淑翁主) 앞에 던지며 “나는 이 원수놈의 물건 때문에 대제학을 하지 못한다”하였는데 이 말이 궁궐로 흘러들어 가고 말았다. 그 말을 들은 선조 임금은 사위 신익성에게 대제학(大提學)에 합당한 사람을 추천하게 하였다. 신익성이 적당한 사람을 추천하자 선조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가 대제학을 추천하였으니, 그대 자신이 대제학이 된 것이나 다름없느니라.”하였다.

신익성은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신익성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고,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신익성은 칼을 뽑아 대신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신익성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낙전당(樂全堂)으로 영의정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선조의 부마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므로서 동양위에 봉해졌으나 국법에 따라 벼슬은 할 수 없었다. 병자호란 후에도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 하여, 최명길(崔鳴吉), 김상헌(金尙憲), 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에 잡혀 갔으나 추호도 굴하지 않았다.

신익성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詩)·서(書)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낙전당 신익성은 노후에 고랭이(지금의 남양주시 조안행정타운)에 수정(水亭)이란 정자를 지어 놓고 유유자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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