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 정은선님이 바움문학상 작품상 수상자 강만수 시인과 대담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
살짝 흐린 하늘에서 봄비가 오락가락 하던 4월의 봄날 인사동 찻집
‘귀천(歸天)’에서 강만수 시인을 처음 만났다. 소탈한 옷차림에 늘 쓰고 다니시는
군용 모자를 눌러쓰고 나오셨는데, 예의 그 맑고 깊은 눈빛은 오래 기억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비루하지 않은 눈은 시인의 강직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창(窓)이었다.
▲정은선 : 선생님, 안녕하세요? ‘꼭 돌아와야만 돼 아이들아’란 세월호 서사시로 이번에 바움문학상 ‘작품상’을 수상하셨는데, 먼저 축하 인사드립니다. 수상 소감 한 말씀 해 주세요.
▲강만수 : 부족한 제가 이런 상을 받게 돼 기 수상한 작가 분들께 폐를 끼쳤다는 생각이 들고요.
주변 동료 작가 분들께도 송구스럽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상선약수(上善若水 ‘물이 최고의 선’)이라고 한 노자의 말처럼, 물빛 고운 그 빛이 가슴을 쿵 치고 차오를 수 있게끔 좋은 시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은선 : 선생님은 어떤 계기를 통해 처음 시를 경험하고 쓰게 되셨나요?
▲강만수 : 어렸을 때부터 시와 소설을 좋아했어요. 문학 소년이라고 할까요?
하하.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인 보들레르와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를 읽었는데,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좋았어요. 아침저녁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그 후에는 이상과 백석 김기림 김수영 김구용 서정주, 박목월 등 청록파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었어요. 다양한 작품을 많이 읽다보니 어느 순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한두 편씩 시가 써졌습니다.
▲정은선 : 많이 읽어야 쓸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선생님께 특별히 영감을 주신 시인이나 스승님이 있으신가요?
▲강만수 : 예술은 스승이 없다는 무사지지(無師之智)란 말처럼 시를 따로 배운 일은 없습니다.
제가 십대 초반부터 오십 중반을 넘긴 현재까지 끊임없이 하고 있는 취미생활이 있는데, 배낭 메고 헌 책방 순례하는 겁니다. 그 시절에는 모두 다 가난을 안고 살았기 때문에 새 책을 바로 구매하기가 몹시 힘들었어요. 하루 종일 점심도 굶어가며 헌책방에서 문학잡지랑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시인 알렌 긴스버그의 시집 <아우성>은 전농동 헌책방에서, 청마 유치환 시인의 <미루나무와 남풍>은 면목동 책방에서 만났죠. 그분들이 모두 스승이 된 분들입니다.
그리고, 제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 온 시인은 중국 성당 때 시인 李白과 杜甫 중당 때 시인인 李賀입니다. 20대에 당시(唐詩)를 읽으면서 동양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이것을 시로 풀어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래서 나온 시집이 <독좌여산>이에요.
▲정은선 : 그래서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그렇게 다양해졌군요. 얘기가 나온 김에 선생님 작품들에 대해 소개 좀 해 주세요.
▲강만수 : 1993년에 첫 시집 <가난한 천사>를 출간했어요. 혼자 시를 쓰는 것과 시집을 내는 것은 다른 의미가 있어요. 혼자 시를 쓰는 행위는 자기만족을 위한 개인적인 행위에요. 그러나, 시집을 내는 것은 타인과의 공유, 소통을 의미하죠. 그런 측면에서 첫 시집 출간 후 우울감이 매우 컸습니다. 한 권으로 끝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17년 후 지인들의 강한 권유로 두 번째 시집을 펴냈습니다. 20대 중반부터 50대 중반까지 썼던 ‘집’에 관한 연작시 500여 편 중 91편을 골라서 <시공장 공장장>으로 묶었죠. 그 후에는 탄력이 붙었어요. <기이한 꽃,(2010)>, <무연사회(2011)>, , <매니큐어(2013)>, <독좌여산(2013)>, <앤디워홀 시 365(2014)>, <아름다운 지느러미(2014)>까지 냈습니다.
▲정은선 : 정말 대단하십니다. 매년 쉬지 않고 시집을 발간하셨네요. 제목도 내용도 참 다양한데, 일반 독자들을 위해 와 <앤디워홀 시 365(2014)>는 특이한 제목이라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만수 : 의 C는 Capitalism의 머리글자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1:99의 사회라고 생각했어요. 1997년 금융 위기가 발발한 후, 부와 가난이 세습되고 직업이 고착화되어 가는 사회 모습을 보면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으로서 이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죠. 앤디워홀은 미국의 유명한 화가이자 팝 아티스트인데요, 마릴린 먼로 등 유명 배우들의 모습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복제 가능하게 만들어서 널리 퍼뜨렸어요. 나도 그렇게 아이들에게 시를 널리 읽히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발표 신작시 365편을 묶었어요. 뭐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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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선 : 결과보다는 그런 시도들이 중요하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번에 수상한 시 ‘꼭 돌아와야만 돼 아이들아’에 대해 좀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를 다룬 많은 시가 있는데, 선생님 시는 그 사건의 서사적 기록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쓰게 되셨나요?
▲강만수 : 그러고 보니, 벌써 세월호 1주기가 지났네요. 작년 4월 16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평상시와는 달리 기분이 언짢고 불안했어요. 가슴이 쿵쾅거리고,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가득했는데, 정체를 모르겠더군요. 주변을 살펴봐도 늘 같은 아침이었는데.... . 사무실에 가는 도중에 뉴스가 나오더군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수학여행 가던 학생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고. 시인은 무당이라고들 하잖아요, 불길함의 정체가 그거였던 거죠.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시단의 선배인 김용범 시인이 서사시를 좀 써 보라는 권유를 했어요. 그 때 생각했어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나보다. 아! 이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구나.’ 생각했죠. 소명의식이랄까요? 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사시의 주제가 생각났어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돌이켜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해서 재구성하고, 마지막은 김용범 시인의 시 ‘새가 된 아이들’로 마무리했습니다.
▲정은선 : 시인의 감수성이 사회적 소명의식과 만나서 탄생된 작품이군요. 선생님의 작품에는 다양한 사회 현상을 무심히 보아 넘기지 않는 시대의식이 들어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수상작 ‘꼭 돌아와야만 돼 아이들아’도 그렇고, 무연사회나 C-1:99 안에 들어 있는 시들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이에요.
▲강만수 : 시인은 어두운 곳을 남보다 먼저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깨어있는 눈빛으로 이 사회의 그늘진 곳을 어루만지고, 널리 알려서 함께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행복한 일이죠. 제 시집에는 꾸준히 그런 내용의 시들을 넣어왔어요.
이번에 나온 첫 번째 시 선집 <피아노 계단>은 제가 지금까지 쓴 총 9권,
1172편의 시 가운데 장애에 관한 시들을 묶었습니다. 여기서 ‘장애’의 의미는 단순히 신체적 정신적 장애만을 일컫지 않습니다. 실직자, 은둔형 외톨이 등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모두 포함한 개념입니다.
▲정은선 :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눈빛이 너무 맑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맑은 눈과 감수성으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많이 써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시는 손글씨로 발표가 되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으신가요?
▲강만수: 이 시는 본래 작년 여름(2014) 문학잡지 <연인>에 발표됐던 작품입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기획했습니다. 아이들을 잊을 수도 없고, 이런 사건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영원히 새기기 위해 친구인 서체예술가 이재순 교수에게 부탁을 했더니, 두말도 하지 않고 흔쾌히 써 주더군요. 정성어린 손 글씨로 모두를 위로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정은선 : 선생님의 정성스런 그 마음이 하늘에 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혹시 앞으로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강만수 : 몇 년 전 ‘휴먼 인 러브’라는 NGO 단체에 콘텐츠를 기부해 제가 쓴 동화 <꿀벌 구조대, 2013>가 라오스어로 번역 그곳 어린이들에게 출판 소개 되었고요. 캄보디아와 미안마어로 번역이 돼 출판을 앞두고 있으니 아이들과 곧 만나게 될 예정입니다. 동시집 <구두쇠 아빠>는 영어로도 번역되어 아프리카에도 소개 될 것 같습니다. 올 해는 이 단체와 함께 일할 기회가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또, 작년엔 중국 청도에 있는 청운중학교에 특강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직접 시인이 방문한 것이 처음이라고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서 함께하고 싶습니다.
▲정은선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강만수 : 두보는 그의 시에서 ‘어불경 인사불휴(語不驚 人死不休)’라고 했습니다. ‘시어(詩語)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꾸미는 행위를 멈추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시를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죠. 이 경구가 늘 저를 일깨우는 채찍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찻집을 나서니, 오락가락하던 비가 멈추고 구름 사이로 한 뼘쯤 해가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