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식탁 오만환 시인
시인의 식탁엔 어느 음식이 올려질까? 그저 분수에 넘치지 않으면 되고 가지 수는 많지 않은게 좋고, 어느 것부터 먹을까? 관심은 음식의 종류가 아니라 생각과 맛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 상상하면서 시를 읽는다.
귤 껍질을 벗기면 그 안쪽으로 파도의 주름살마다 바다를 임신한 알맹이들이 섬처럼 열려 있다 하나 따서 입에 물면 질서 없이 터져 나오는 신맛에 가볍게 온몸이 달아올라 슬며시 눈감으면 황금빛 바람으로 터지는 마음의 바다
-신종호 시 <귤 속의 바다>(리토피아)
우리는 <현대시>를 곧 <이미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기법상 전혀 별개의 사물과 사물을 혼합하여 또 하나의 명확한 윤곽을 그려낸다. 물론 그 안에 충돌과 융합이 있고 의미를 만들어낸다면 시의 세계는 한층 깊어진다 누구나 먹는 귤인데 시인이 껍질을 벗겼을 때 주름살 마다 바다를 임신한 파도를 느끼고 알맹이에서 섬을 본다. 시인의 마음은 바다를 지나 질서 없이 터져나오는 신맛에 온몸이 달아오르고 슬며시 눈을 감는다. 황금도 가벼워지고 바람으로 터지는 빛과 소리, 필자는 해변에서 만났던 女子(여자)와 함께 바라보았던 하늘의 무지개를 붙잡으려 달려가는데 잡히지가 않는다. 어쩌면 맛과 생각이 이루는 귤에서 둥글고 오묘한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생명의 근원이 <물> 아니냐고 되묻는지도 모른다. 그 신맛에는 쓰고 단 삶이 스며있지 않겠는가? 발표된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몫일 테니 말이다
햇살이 두손을 벌리며 다가온 아침 식탁에 피어난 두릅나물 생전에 즐기시던 아버님이 걸린다며 그녀가 웃는다 입안 가득 퍼지는 연두빛 비타민 향기
미는 즐거움의 인식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가끔 한 줄기 기쁨이 전신을 흔들고
물방울 같은 생각들이 눈가에 맺힌다 언젠가는 나의 빈자리를 채우며 큰애는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진하게 커피를 타면서 나의 온기를 감지할 수 있을까 순하게 씹히는 두릅나물에서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는 것처럼...
뚝뚝 봄 내음 흘리며 접시에 가지런히 돋아난 풀밭 사이로 뒷 짐진 헛기침 소리 낯익은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계설 시 <두릅나물>(문예운동)
식탁 앞에서 시인은 그녀에게 한없는 감사와 사랑을 느낀다. 시인은 아내라는 말을 아버지라는 말보다 앞에 세우기를 부끄러워한다. 순하게 씹히는 두릅나물에서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고 물방울 같은 생각들을 한다. 큰애의 내일과 접시에 가지런히 돋아난 풀밭이 정겹기만하다. 뒷짐진 헛기침 소리와 낯익은 모습에서 연륜과 自我(자아)의 열린 길이 멀리도 투명하게 보인다
유쾌한 항해도 곧 지루하기 마련이다 망망대해에 난 해로를 따라 가는 길엔 배가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배를 길 따라 인도한다
그러니 바다를 노하게 하면 안 된다 한번 바다가 노하면 아무리 거대한 배라도 단번에 난파할 수가 있다 궁궐 같은 호화유람선 타이타닉호의 최후는 바다가 배를 거대한 빙산에 부딪히게 한 때문이 아닌가
난파한 배의 최후는 얼마나 비참한가 난파 전 선실 안에 벌어졌던 호화판 환락과 음란의 극치들 술과 춤과 도박에 탐닉한 군상들의 얼굴들 그 비극적인 최후는 우리의 것일 수도 있다
구명정에 탄 사람들이 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기까지 한다 생존 경쟁을 위하여 식인종까지 된다
우리는 그렇게는 하지 말자 바다를 거스려 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바다와 화친하고 사랑하자
-김선옥 시 <難破船난파선>(한맥)
배는 구멍이 뚫린 듯 하고 생존경쟁을 위해 식인종까지 되려는가? 우주를 창조하고 경영해나가는 그 神(신)의 입장에서 시인은 세상을 비판하고 예언의 글을 쓴다. 영화 <타이타닉>과 현실의 빙산을 음미하면서 시를 읽는 재미가 여름 밤의 지루함을 잊는다. 바다와 하늘과 시인! 무엇이 슬프게 하는가? 누가 시인을 怒(노)하게 하는가? 그렇다 술과 춤과 도박에 탐닉한 군상들 그 비극적 최후는 우리의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라는 <난파선>의 경고가 숨가쁘게 들린다
보도 블록 옹색한 틈에 민들레꽃 노랗게 피고 보라색 제비꽃 하나 당당히 존재를 드러내는 것을 본다 보기 좋은 자리 눈에 뜨이는 자리에서 자랑스레 피는 꽃 되지 못해도 흙 한줌 있으면 그저 피어나는 것을 어찌하랴
봄 되었으니 다시 살아보겠다고 얼굴 내민 질경이 이파리 몇 개 그 옆에서 애처러워 서럽지만 거기가 그들 자리인 것을 본다 궁색한 자리에서 더 빛나는 존재 있고 그래서 이 세상 더 살맛 나는 것을 사는 데는 그만한 흙만 있으면 되는 것을
그들이 아는 일을 나만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하랴
-이홍자 시 <보도 블록 틈에>(한맥)
보도 블록 틈에 얼굴 내민 질경이에서 삶의 끈질김과 외경(畏敬)심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은 존재의 근원을 지향한다. 질경이의 삶에서 곧 곤궁한 시대의 인간을 떠올리고 포성 없는 전쟁과 흙 한 줌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하면서 민들레와 제비꽃이 알고 있는 그 일을 나만 모르고 있었으니 어찌하랴! 그 탄식과 여운이 시의 아름다움으로 오래 씹힌다.
아무리 돌려도/ 감기는 것 없어 무일푼으로 사는게/ 숙명이라며 까닥까닥 돌고 도는/ 지겨운 여름 차라리 힘겨웁다 말할까해도/ 시간은 멈춤 없이/ 지나만 가고 목태운 더운 바람/ 온몸 휘감아 그래도 얼굴 디밀고/ 땀 식히며 행복해 하는 사람들 보면/ 그래그래 내 한 몸 희생하련다 씽씽 불어대는/ 휘파람소리
-신금열 시 <선풍기>(한맥)
선풍기, ‘너 수고 많구나’ 하는 따뜻한 시선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사람과 기계에 대한 긍정적 바라봄이 의인법으로 또 하나의 뜻을 가지고 씽씽 돌리며 지겨움을 쫓는다
뿌리 깊이 고여있던/ 그리움을 퍼올려// 하늘이 혼절하도록/ 눈부신 빛 피워놓네// 며칠밤/ 뜬눈으로 살다가 훌쩍 떠나가는 새
-김강호 시 <목련·3>(정신과 표현)
목련의 아름다움과 그 혼절! 며칠 밤 뜬 눈으로 살다가 훌쩍 떠나는 새와 사랑의 아쉬움을하나의 비극적 영상으로 짧게 보여준다. 목련과 하늘의 혼절과 새를 하나로 엮어내는 구성의 내밀함이 시의 완성도를 높게 한다.
바닷가 모래밭에서 뒹글고 있는/ 속이 훤한 빈 사이다 병 하나// 바닷물은 아이들같이 깔깔거리며 밀려왔다 밀려가고 사이다 병은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 투명한 병 속에 가득한 햇빛과 파도소리 빈 몸뚱이 그대로 번쩍이며 춤을 추는 듯한 병// 빨간 노을이 빈 병 속에 들어가/ 꽃이 되어 붙타고 있다.// 둘 다 벗은 채/ 행복하게 불타고 있다. -심상운 시 <빈 사이다 병>(문예운동)
빈 사이다 병과 파도의 만남이 마냥 즐겁고 둘 다 벗은 채 사랑을 불태우는 어깨 들썩임과 로맨틱한 소리가 여름 해변을 연상하게 한다. 시인의 예리한 눈과 시 작업과 섹스가 다르지 않음을...., 필자는 몰입과 힘겨움과 기쁨을 이 시에서 감각으로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