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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2
  • 기사등록 2016-01-27 08:4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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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나. 벌써 두 달 전에 판매된 상품인데 이제 와서 전화를 건 거 보면 진상이 확실하다. 이런 사람이 원하는 것은 환불 아니면 보상금이다. 회사 측에서는 최대한 그런 고객을 달래서 환불을 막도록 교육을 시키지만, 사람 마음 돌리는 게 쉬운 일인가? 그것도 이미 단단히 독이 오른 사람 마음을.


오늘 하루도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악령들과 씨름이구나. 악령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목숨 부지해서 무사히 퇴근하려면 성질 죽이자. 안 그러면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어쩌면 오늘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저승사자한테 끌려갈지도 모르겠다. 이 고객 만만치 않다. 죄송하다고 몇 번을 말해도, 환불을 해주겠다고 해도, 고객을 기만한 것에 대해 정신적 피해보상을 해달라고 우긴다. 역시나 블랙답다.


블랙은 일명 블랙리스트에 오른 고객을 말한다. 회사는 우량 고객을 브이브이아이피(vvip), 골드(gold), 실버(silver) 등의 계급으로 분류하는데 진상 고객도 등급을 분류한다. 진상 중 최하급 고객은 옐로우(yellow), 그나마 잘 달래면 되는 등급이다. 기분파 고객이라 응대만 잘하면 오히려 다루기가 편하다. 레드(red)는 까칠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진상들이다. 여기가 지들 스트레스 해소하는 데야?, 싶을 정도로 바락바락 악을 써댄다. 이들은 그냥 들어주는 것밖엔 답이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욕과 소리를 질러대니까. 그러다 지 승질에 못 이겨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대다수. 결국 그들은 아무 보상도 못 받아내는 실속이 전혀 없는 진상들이다. 대신 그 모든 욕과 진상짓을 받아내는 우리만 죽어날 뿐이다. 그 다음이 블랙(black)이다. 이들은 대책도 대응 방법도 없다. 이들 중에는 아주 개차반인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따박따박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며 보상금을 타내는 이들도, 레드라벨처럼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다가도 이성적으로 따져대는 이들도 있다. 총체적난국인 최대 진상 고객 등급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는 이들에게 환불을 해주는 것을 최선의 방침으로 내밀 뿐. 방법이 없다. 환불도 회사에서는 최대한으로 양보한 거니까.


그런데 이 고객 너무한다. 말을 놓는 것까진 이해가 되지만 나를 사기꾼 취급하며 거친 말을 해대는 건 못 참겠다. 아니, 내가 속였어? 이런 건 제조사에 따지란 말이야. 나한테 30분 동안 조목조목 잘못을 따질 바엔 그냥 니가 이불을 만들라고!


치솟는 화를 삭이는데도 블랙은 감당이 안 된다.


‘유 윈(You win)!!!’이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고 싶은 열망으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겨우 6개월차 홈쇼핑 고객상담사인 내가 블랙라벨이라니. 이런 건 능숙한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한다. 나 같은 초짜 감정노동자는 상대할 수 없다. 결국 나는 내 상관인 박팀장에게 SOS를 요청했다.


극심하게 허기가 졌다. 몇 시인지 보려고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다.


‘한지민님 ○○ 카드(12월 17일 기준)

결제대금 미납으로 

타사와 연체 정보가 공유될 수 있습니다.

결제대금 확인 후 입금바랍니다.’


아, 잊고 있었다. 카드값을 넣어놨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젠장. 난 쓴 게 없는데 왜 항상 돈이 부족한 거지. 그런데 이 싸가지 없는 메시지 좀 보소. 내가 지네 카드를 써주는 고마운 고객인데, 연체 정보를 뭐 어째? 내가 어쩌다 한 번 카드값 넣는 거 잊었다고 이따위 메시지를 보내? 더럽고 치사하다. 지킬과 하이드도 아니고 웃는 얼굴 뒤에 칼을 품고 있네. 요망한 것들.


시간을 확인하기도 전에 짜증이 왈칵 밀려들었다. 아침부터 블랙라벨한테 시달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저승사자 팀장에게 끌려가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서 그런 걸까. 어제 잠을 푹 잤는데도 눈 밑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기분이었다. 이번 주는 점심시간 근무라서 밥을 먹으려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통화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초콜릿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초콜릿이 혓바닥 위에서 다 녹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정성을 다, 우, 음.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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