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제가…”
그런 말은 다른 데 가서 하라고. 나도 내 학자금대출 갚기도 빠듯하게 살고 있단 말이야. 당신만 사정 있냐? 나도 사정이 있다고. 내가 카드값만 아니면 당신 전화 받지도 않았어. 이런 건 심리상담사나 경찰한테 말해.
“그런데 왜 안 도와줘요? 이게 다 거기 때문이라고. 니네가 그 이불만 안 팔았어도, 니네가 방송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진 안 했다고! 내가 날개 달린 것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시엄마가 일부러 산 거야. 내가 비둘기만 봐도 기겁하는 걸 안다고. 심지어 난 치킨도 안 먹는 사람이란 말야. 내가 얼마나 날개 달린 것들을 싫어하는데!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그 이불을 덮어주는 거야. 난 춥지 않다고. 얇은 이불만 덮어도 되는데, 왜 자꾸 그 이불을 나한테 덮어주느냔 말이야.
너네가 그랬지? 그 이불 덮고 자면 어깨 결리고 허리 아픈 게 없어진다고. 겨우 이불 하나 덮고 잔다고 그런 게 없어진다니, 말이 돼? 이불이 만병통치약이야? 이불 한 장 더 팔아먹으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사람을 현혹하느냔 말야. 내가 시어머니한테 아니라고, 그런 이불은 없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 TV에서 나온 거라고, TV에서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시어머니는 끝까지 우겨대더군. 내가 아니라고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도 안 믿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시어머니나 덮으라고. 그랬더니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것도 그 거위이불을 덮어씌우면서! 내가 얼마나 날개 달린 것들이 싫은 줄 알아?
어렸을 때였어. 내가 일곱 살 때였지. 크리스마스이브. 그날은 특별했어. 내가 천사를 하기로 했거든. 하얗고 커다란 날개를 등에 매달고 머리엔 하얀 관도 쓰는 거였어. 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우리 원장님이 날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알아?”
과거를 회상하는지 말이 잠깐 끊겼다.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빌어먹을 고객님은 자기 할 말만 해댔다. 진상 고객들의 기본 매너라고 할까. 남의 말 안 듣기.
“천사를 하는 아이는 항상 입양이 됐었어. 후원자들은 천사 날개를 단 아이를 제일 눈여겨보거든. 그래서 내가 그 날개를 달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원장님이 그 얄미운 미영이한테 천사 역할을 시키려는 걸 막으려고 직접 원장실까지 찾아갔다고. 나는 알고 있었거든. 원장님이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거. 하지만 그런 거야 몇 번만 참으면 되니까. 천사만 되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꾹 참았어. 그래 몇 번이야, 잠깐만 참으면 되, 몇 번만 참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 입양만 되면!”
삶이 참으로 고되셨겠네요. 어린 나이에 추악한 짓까지 당하셨군요. 그래도 그땐 무작정 행복해도 좋을 나인데. 지긋지긋하게 긴 인생(발달된 의학의 혜택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진 것이 과연 행복일까? 겨우 하루를 연명하는 나 같은 하층민에게 의학의 발달은 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어쩌면 금수저를 가진 자들의 저주일지도. 금수저를 배부르게 하려면 금수저를 떠받치는 노예들, 흙수저가 필요할 테니. 어쩌면 의학의 발달은 돈 있는 자들의 꼼수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너무 배배 꼬인 것일까?)에서 가장 좋을 때라면 철없이 엄마 아빠한테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를 쓰며 세상을 자기 맘대로 살던 어린 시절이 아닐까. 어른만 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상상하던 철없는 시절 말이다.
그런데, 나 이거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니? 당장 112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몰라. 어쩌면 이 고객님 심심해서 나랑 놀자고 하는 걸까? 괜히 112에 신고했다가 귀찮아지는 거 아니야? 내 삶도 고달픈데 남의 삶에 끼어들 여력은 더욱 없는데. 그냥 대충 들어주다가 제 풀에 지치면 끊겠지? 밥 먹으러 가기 전에 소설 한 편 듣는다,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
“그런데 그날 일이 벌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