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고객님, 제 밥시간은 지켜주셔야죠. (물론 비정규직에게 정확한 출퇴근시간과 점심시간 보장은 나라에서도 지켜주지 않지만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죠.) 제가 지금 엄청 배가 고프답니다. 빨리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여긴 성폭력상담소가 아니에요. 홈쇼핑 고객상담실이라고요. 제가 고객님께 강조하고 싶은 건 여긴 고객상담실이라는 겁니다. 설마 제가 끊지 않고 다 듣고 있다고 해서 저를 심리상담사로 착각하신 건 아니죠? 그것도 아니면 신부님으로 착각하시는 것도 아니죠? 전 고해성사를 받아줄 수도, 받아줄 심적 여유도 없답니다. 그렇잖아도 고달픈 제 어깨에 당신의 고단함을 얹진 말아주세요.
저는 지금 제 삶만으로도 충분히 괴롭고 고통스럽답니다. 긍정의 힘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10년 후의 미래, 더 나아가 노후 계획까지 세우는 것 같던데요. 전 내일 하루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해요. 과연 내일 해가 뜰지도 모르겠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만 그건 저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말이랍니다. 그건 아메리칸드림이 성행하던 미국에서나 어울리는 말이고요. 현재 대한민국의 비정규직인 제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랍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저에게 그런 여유 따윈 사치랍니다. 여자 대 여자, 인간 대 인간으로 당신의 아픈 상처에 대일밴드 쪼가리 하나라도 붙여주고 싶지만 제겐 그 값싸고 흔한 대일밴드 하나조차 버겁답니다.
제가 묵묵히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도 팀장의 서슬 퍼런 눈빛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더욱 상처 받을 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신이나 나나 벌레만도 못한 하루살이 인간들인데요. 누구한테 밟히고 짓이겨져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버러지들.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요. 저도 이제 밥 좀 먹고 짤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힘을 내야지요.
“이제 확실히 아셨죠? 제가.왜.거.위.털.이.불.을.못.견.뎌.했.는.지?”
아주, 명백하게,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거위털이불에 들어 있는 시체인지 시어머니인지는 경찰서에 전화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고객님. 거위털이불이 별로셨다니 안타깝네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고객응대 매뉴얼대로 이야기를 돌려보고 애썼다. 진짜다. 녹음된 내용을 들으면 팀장도 놀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달의 우수사원으로 뽑힐 수도 있겠지. 아니다.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이름에 달린 C라벨을 B라벨로 바꿔줬으면.
상담직원의 응대에 고객 불만이 접수되거나 해피콜 설문에서 받은 점수, 상관의 직원 평가 등으로 매달 상담직원의 등급이 매겨지는데, 나는 최하등급인 F라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일 높은 등급인 S라벨도 아니다. 평균인 B라벨이라도 달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불안에 떨며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될 텐데. 휴―.
오전에 팀장에게 찍힌 걸로 봐서는 이번 달도 C라벨을 벗어나긴 힘들 것 같다는 나의 예상이 빗나갔으면 좋으련만. 이런 예상은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다.
“거위털을 모조리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털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요. 절대로 이불에 거위 털이 하나도 있으면 안돼요. 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