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죄송합니다만, 거위 털만 수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상품으로 교환을 원하시는 건가요?”
절대 ‘환불’이라는 단어를 먼저 쓰지 말 것. 박팀장이 누누이 강조하는 거다. ‘보상’이라는 말도 되도록 사용하면 안 되는 금기어다. 고객이 먼저 그런 단어를 쓰기 전까지는 먼저 말하는 건 소위 ‘호구’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게 우리 팀장의 지론이다. ‘교환’도 금기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팀장도 인정해 줄 거다. 거위 뿐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모든 조류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소비자를 상대하는 건 꽤나 힘든 레벨이니까.
회사에 득(得)이 되어야지 실(失)이 되면 안 된다.
고객상담실은 고객의 불만을 들어주고 적절히 해소시켜주는 곳이지, 절대 고객을 만족시켜주는 곳이 아니다.
고객상담실은 고객이 만족했다는 기분이 들도록 해주는 곳이다.
우리 박팀장의 책상에 붙어 있는 표어다. 팀장의 말이 맞다. 세상에 어떤 기업이 고객들을 100%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물건을 만든단 말인가. 튼튼한 물건? 웃기네. 너무 튼튼하면 신제품이 어떻게 팔리겠는가. 적당히 2, 3년 정도 쓰다가 망가지도록 만들어야 새로 개발한 상품을 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물건을 사도록 유도하고 산 물건에 ‘만족을 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몇 달만 지나도 금방 트렌드에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이 모든 게 기업들의 판매 전략이다. 고객상담실도 기업의 판매 전략 중 하나다. 고객들을 위한 곳이라는 기분이 들도록 전화도 빨리빨리 연결되고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응대하는 것 모두 눈 가리고 아웅이랄까.
“당장 이불 가져가. 교환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전부 니네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이불 속에 드러누운 시엄마도 가져가.”
아, 결국 올 게 오고야 말았구나. 난감한 이 고객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할 터인데. 지금 내 뱃속에서는 배고프다고 거지가 울어대고 있고. 난 벌써 40분 째 고객의 소리만 귀담아 듣고 있으니. 하루가 더해져 경력이 늘어나면 고객 응대 노하우가 쌓이는 게 아니라 미간의 주름만 더 깊어졌다. 심장은 딱딱해지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냉소적이기만 하다. 회사에서 내일을 살아갈 월급을 받는 대신 나는 회사에 내 말랑말랑한 심장을 떼어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망상 하나.
난 캄캄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어도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그때 무대 위로 떨어진 핀조명 한 줄기. 작은 여자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이 어색할 정도로 온통 하얬다. 등에는 몸뚱이만한 큰 날개를 달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에 하얀 스타킹, 하얀 리본이 달린 구두를 신고. 예뻤다.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천사처럼. 아이는 붉은 입술로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가슴을 찢어냈다. 너무 놀라서 멍하니 찢겨진 가슴을 내려다보는 사이, 아이가 천진한 눈빛으로 작은 손을 내 벌어진 가슴 속에 찔러 넣었다. 아이는 가슴 속을 헤집어대더니 펄떡이는 심장을 뽑아냈다. 텃밭에 자란 잡초를 뽑아버리듯 인정사정없었다.
좀 전까지 콩닥거리던 두근거림이 사라졌다. 가슴이 시렸다.
나는 건전지가 떨어진 인형마냥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도 움찔거릴 수가 없었다. 새카만 천장이 보였다. 빛이라곤 오진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작은 아이에게 떨어지는 핀조명 하나뿐이었다. 아이는 양손으로 꽉 움켜쥔 내 심장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