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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9
  • 기사등록 2016-02-27 11: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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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와 내 심장을 번갈아보더니, 나와 눈을 맞추며 내 심장에 작고 하얀 이빨을 박아 넣었다. 천천히. 아이는 작은 입 가득 심장을 베어 물고 오물거렸다. 하얀 얼굴 여기저기, 하얀 원피스 군데군데, 하얀 스타킹과 하얀 구두에까지 핏방울이 튀었다. 아이가 심장을 물어뜯을 때마다 아이의 키가 한 뼘씩 커졌다. 내 심장이 작아질수록 아이는 쑥쑥 커졌고 하얀 옷에 묻은 붉은 자국도 번져갔다. 마침내 아이가 내 심장을 다 먹어버리고 손바닥에 묻은 피를 핥아먹었다.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다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어른 여자.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


잠시 고민하는 찰나 날카로운 비명이 내 고막을 꿰뚫었다.


“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당장 이불 가져가라고요.”


아차. 너무 딴생각을 했다. 고객의 불만을 기분이 좋아지게끔 적당히 해소시켜줘야 하는데.


“고객님, 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거위털이불을 구입하신지 두 달의 시간이 경과되어 상품 교환이 어려운 부분이 있으신데요. 아무래도 시일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제품판매사와 협의를 해야 하는 부분이어서요, 당장 확답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 부분을 확인한 후에 3시간 이내로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


“교환 안 해줘도 되요. 그냥 이불만 가져가세요.”


“고객님, 거듭 죄송합니다. 교환이나 반품이 아닌 이상 저희가 이불만 수거하기는 힘듭니다.”


“안 가져간다고요? 왜요? 나 이불 안 쓸 건데. 필요 없다고요. 저 이불 좀 치워줘요. 흐흐흐흑.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요.”


버릴 거면 그냥 헌옷수거함이나 쓰레기장에 버리라고. 왜 여기까지 전화해서 저러는 건지. 답답하다, 답답해.


“고객님, 혹시 제가 고객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는데요, 이불을 버리려고 하시는 건가요?”


“네. 맞아요. 우리집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요, 고객님. 주소지가 아파트이신 걸로 고객 정보가 등록되어 있으신데요. 아파트 쓰레기장 인근에 헌옷수거함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이불을 버리시는 건 어떨까요? 이불을 버리시려는 거면 그게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아, 그런 게 있었군요. 고마워요.”


설마. 이걸로 끝이야? 정말?


“고객님, 또 다른 문의 사항이 있으신가요?”


“아뇨. 됐어요. 시엄마는 그 이불을 좋아하니까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놔둘게요. 고마워요.”


“고객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오히려 제가 기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상담사 한지민이었습니다.”


자, 이제 끝. 빨리 끊어라. 나 밥 먹으러 가야돼. 밥 좀 먹고 삽시다, 좀!


전화 저편에서 멈칫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다렸다. 고객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니까. 고객이 전화를 끊기 직전 작게 속삭였다.


“내 얘기, 다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요.”


뚜―.


드디어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귀에 꽂은 헤드셋을 뽑아내듯 벗겨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솟았는지 축축했다. 이제 드디어 밥 먹을 시간이었다. 서둘러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민씨. 어떤 고객이길래 50분이나 통화를 한 거야?”


박팀장이었다. 저승사자. 나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20년은 더 많은 양 구는 뼛속까지 늙어버린 팀장.


“아, 거위털이불 수거해달라고 하셔서요.”


“이불? 두 달 전에 판매된 거? 오늘 그거 문의가 많네. 어젯밤에 SNS에 떴다더니. 그래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두 달이나 쓴 거를 지금 환불해달라는 게 제정신이야? 요즘 사람들 진짜 기본적인 상식이 없어요. 상식이. 지민씨,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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