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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 문학관 - 세상과 삶, 시詩를 품다 - 홍석주(박인환 문학관)
  • 기사등록 2016-03-10 08:4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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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를 품다 오늘은 Don McLean의 노래 “starry starry night”가 귓전에 맴돈다.

세상과 삶을 다 품고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 고흐의 생을 마감하게 했듯이, 시대적 현실과 시를 모두 품었던 시인 박인환. 짧은 생애 그가 살던 세상은 고독했다.

“인간은 소모품이다.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 세상을 뜨기 사흘 전, 이상 추모의 밤에서 그는 이 글을 남겼다. 그렇게도 그를 고통스럽게 한 세상도 시로 끌어 안은 그. 그가 겪은 세상에서 진정한 시인의 길을 실천했던 모습 역력하다. 소양강 상류에 너르게 펼쳐진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이 곳 생가터에 2012년 10월 박인환 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시인 박인환의 거리’를 조성하여 시인의 문학적 감수성을 경험하도록 하였다.

‘시가 열리는 사과나무’, 시 「목마와 숙녀」를 형상화한 ‘하늘이 비치는 시 벤치’, ‘책 읽는 목마상’과 청동상 <시인의 품으로>를 설치했다. 부인 이정숙 여사는 이 형상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바바리 코드를 여미며 오른손에 펜을 들고 있고, 멀리 날아가 버린 넥타이, 시 정신을 잃지 말라는 우수에 찬 강렬한 눈빛은 생전 시인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유리벽을 장식한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이 눈에 들어온다. 박인환 문학관은 그의 짧은 생애동안 실천한 문학적 삶이 서울 명동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어 콘텐츠로 활용됐다. 문학관 내부는 정렬적으로 문학 활동을 펼쳤던 1950년대 ‘명동’의 모습을 재현해서 조성했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기에 담론을 나누며 밤을 밝혔던 서점, 다방, 선술집 등 역사적 장소를 현장감 있게 꾸며, 그의 문학세계를 반추해 보도록 했다. 해방공간과 전쟁통, 전쟁 이후 작고할 때까지 문학적 전환기를 맞았던 그의 시대를 경험하며 시인의 문학인생을 나눌 수 있다. 시인과의 첫 대면은 마리서사에서 시작한다.



■ 해방공간과 <마리서사> 우리 글과 말을 쓸 수 없던 일제 강점기, 문학을 가슴에 묻고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는 용돈을 모아 문화예술 서적을 사 모았고, 서구 문학작품을 읽기 위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독학했다. 광복이 되자 그는 종로 3가 낙원동 입구에 서점 <마리서사Librairie Marie>를 연다. 그동안 수집했던 세계문학전집 등 문학 서적과 앙드레 브르통, 마리 로랑생, 폴 엘뤼아르 화집, 스트븐 스팬더 등의 문예지 등을 갖추어 놓았다. 작가와 예술가들은 입소문을 타고 문학예술 전문서점 <마리서사>로 몰려들었다. 서점은 그들의 사랑방이 되었고 정보 교류의 장이 되었다. 그는 김광균, 김기림 등과 교류하며 문학세계를 넓혀갔고 모더니즘 시운동에 뜻을 둔 시인들과 만나게 된다. 이들은 기성문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변화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는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하고 문단에 나온다. 그러나 문학계는 친일문학 청산과 민족문학의 방향 정립이라는 공통 사명에도 불구하고, 좌우익이 대립하고 있었다. 급기야 공산당 세력이 조정하는 사회주의 계열 문학단체 조선문화건설본부 등을 조직하여 문학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였다. 반면 민족문학 계열에서는 한국문학가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몇몇 작가들의 월북과 월남 등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등 혼란함이 지속되었다. 마리서사는 그에게 안식처였다. 모더니스트의 길을 추구하며 좌우익을 아우르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또 많은 문학인들과 교류하며 청년기 문학의 꽃을 피운 산실이었다. 그러나 서점엔 책을 사러오기 보다는 교류를 위해 오는 사람이 많아졌고, 경영은 점차 어려워져 1948년 3년만에 폐업하기에 이른다.



■ 새로운 시정신에 불씨를 놓다 혼란한 시대를 바꿔보겠다는 문인들은 명동으로 모여들었다. 명동의 다방과 대포집은 정보와 지식을 나누던 창구역할을 했다. 시인 김수영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빈대떡집 ‘유명옥’과 고전음악을 틀어주는 ‘봉선화 다방’은 그와 동료들이 모여 교류하고 담론을 나눈 곳이다. 모더니즘 시운동을 전개했던 그는 1948년 동인지 『신시론』 1집을 발간한다. 마리서사에서 교류했던 김경린, 양병식, 김수영, 임호권, 김병욱 등이 참여했다. 『신시론』은 우리 글에 대한 현대적 감각을 부여하고 시적 형태의 새로운 모색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통적인 서정시에 반발하고, 좌우익의 대립, 서구 문화 유입으로 인해 급격하게 바뀌는 도시화 현상을 비판한다. 시단의 중심을 이룬 그는 1949년 5인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한다. 미래 시대를 위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그는 “분열한 정신을 우리가 사는 현실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내 보이며, 순수한 본능과 체험을 통해 본 불안과 희망 두 세계에서 어떠한 것을 써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작품을 발표했다.”고 선시집에서 술회했다. 시대를 아우르며 시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 받아들여야만 했던 전쟁 세상을 시로 승화시키고 싶었던 그에게 6.25는 절망이었다. 총성과 포성 소리를 매일 들으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생존해야 했던 전쟁을 겪는다. 긴박한 공포 속에서 피난도 가지 못한 채 세종로 한복판 집 지하실에서 가족들과 9.28 수복 때까지 숨어지낸다. 수복되기 3일 전 태어난 큰 딸. 전쟁 중에 태어난 새 생명을 지키기 위해 12월 엄동설한에 가족들을 피난시키며 마음 조였을 아버지의 정情을 참담하게 그렸다. 기총과 포격의 요란함을 받아 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중략…) 눈 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화차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중략…) //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데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 줄 사람이/ 살아있을 것인가 ──박인환, 「어린딸에게」 전문 그는 종군기자로 일하면서 1951년 문총구국대 종군 작가단에 들어간다. 이곳은 후방에서 종군 내용을 기록하고 발표회를 열기도 하는 부서였다. 여기서 그는 영등포 한강대안전투에 참여하였고,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가는 군인들의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다. 또 서부전선에 속한 고향 인제와 강원도 전투지도 돌아보게 된다. 전쟁 중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고향은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그래도 그는 피난처 부산에서 <후반기> 동인과 모더니즘 시운동을 펼치는데 마음을 쏟는다. 험란한 피난길에서 서울 집 땅 속에 묻어 둔 <후반기> 동인의 원고를 가지고 와 동료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김경린 이상로 이한직 조향 김차영이 함께 한 작품이었다. 긴박한 생사의 경계 속에서 황폐해진 인간성을 시를 통해 극복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 내면의 의식세계를 표현해 보고자 했던 <후반기> 동인은 해체되고 만다. 돌아온 서울은 폐허였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고 겪은 후 상실된 영혼. 시 「목마와 숙녀」는 내면세계의 흐름을 그만의 독특한 감수성으로 이미지화시켰다. 전시실 ‘모나리자’에서는 이 시를 음미해 볼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중략…)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 (…중략…) /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중략…) // 세월을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중략…)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중략…) /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중략…) /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중략…) /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일부 잃어버린 삶의 가치, 그 고통의 깊이와 그 고독을 견뎌낸 흔적이 역력하다. 이데올로기와 전쟁으로 인한 현실을 껴안으며 흐트러지지 않으려는 시인의 영혼이 녹아있다. 또 그가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영상도 소개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 세계를 다룬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시인이자 화가, 영화 제작자였던 장 꼭토, 화가 모딜리아니다. 이 시절 그는 영화에 관심을 갖고 미국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 시인의 자유 그는 종군기자 생활도 청산하고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한다. 여기서 미국여행의 기회를 얻는다. 미국은 완전히 달랐다. 소외당한 이방인으로 약소국 국민의 정체성을 생각해야 했다.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른 부조리도 동시에 존재하는 나라였다. 또 미국은 자유가 존중받는 사회였다. 추상표현주의 미술과 팝아트의 모티브가 된 대량생산 등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 이는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 문화의 현실을 비판했고 이는 「아메리카 시초」에 잘 나타나 있다. 귀국한 그는 1955년 겨울 총 54편의 시를 실은 첫시집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한다. 시집 제목도 직접 도안하고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백석이 축사를 했고, 노경희의 시낭송과 현인이 샹송을 불러 축하했다. 이 날 그는 밤이 이슥해지도록 술을 마시며 자축했다고 한다. 가을에는 우윳빛 레인 코트, 겨울에는 러시아 풍의 깃 넓은 기장의 긴 쥐색빛 외투를 입고 다녔던 댄디보이. 완벽하게 차려입는 그의 옷갖춤은 세상이 주는 무게를 정돈하고 정신을 바르게 하기 위한 자기 표현이었다. 온갖 세파를 겪으며 지켜온 시정신에 축배를 올렸을 것이다. 선시집 후기에는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10여 년 동안 시를 써 왔다. 이 세대는 세계사가 그러한 것과 같이 참으로 기묘한 불안정한 연대였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 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이 10년 동안에 여러 가지로 변하였으나 본질적인 시에 대한 정조와 신념만을 무척 지켜온 것으로 생각한다.



■ 세월이 가면 1956년 이른 봄. 술집에 혼자 앉아있었던 그는 종이와 펜을 꺼내 고치고 다시 쓰며 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다. 시를 읽은 이진섭은 즉석에서 곡을 붙였고, 그 자리에 있던 테너 임만섭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널리 퍼져 모르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박인희가 부른 곡은 이후 다시 유행한 것이라 한다. 시를 쓴 일화는 밀린 외상값 때문이라고 한다. 술값을 갚으라는 독촉에 그 자리에서 시를 쓰고 곡을 붙였는데, 시에 감동하여 외상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시인 이상 추모의 밤을 연 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밴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환, 「세월이 가면」 전문 문학관에는 시인의 시집도, 동인지도, 육필 원고도 없다. 너무 짧은 생애였기에 유품이 거의 없다고 한다. 시선집 복사본 1권을 어렵게 구해 보존중이라고 한다. 유품의 발굴 수집이 이루어져 그가 추구하고자 한 시세계가 더 풍성해질 것을 기대해본다. 인제 ‘내린 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남 세형 씨는 “고향의 햇빛, 공기가 아버지의 마음속에 들어와 시가 되었다.”고 부친을 회고했다. 오늘은 비발디Vivaldi 음악 사계 중 ‘여름’을 몇 번이고 들었다. 폭풍우와 천둥 번개 치는 한여름을 쉴 새 없이 달려가는 연주가 그의 삶처럼 들린다. 그리고 가을이 다가온다. 고요하고 청량하게 시가 열리는 나무처럼. 홍석주 / 『월간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꽃시편』, 『예술원 사람들』(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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