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보다 더 나를 할퀸 것은 ‘쪽팔림’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의 장난감인양 휘둘렸던 것도 싫었고, 그렇게 맥없이 당했다는 것도 싫었다. 나름 운동도 했으며 전교에서 놀던 성적, 매번 회장도 했었다. 난 모든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아이들에게는 엄친아,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니, 그랬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엎어졌다.
그날 이후 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기말시험은 이미 하던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혼자 공부했고, 시험은 상담실에서 상담선생님의 감독으로 따로 시험을 봤다. 그 외 수업일수나 그런 것은 엄마가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난 조용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물론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다. 졸업앨범이 배달됐지만, 난 택배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재활용품 수거함에 던져버렸다.
아버지는 내가 기말시험이 끝나고 일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 들어왔다. 평소에도 쉽게 말 붙이기 힘든 아버지였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 아버지는 더욱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도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서로를 향해 냉랭한 기운을 내뿜을 뿐이었다.
이사를 갔다. 서울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작은 지역으로. 아버지는 서울에 그대로 머물렀고 난 엄마와 함께였다. 아버지와 엄마의 공식적인 별거 상황까지는 아니겠지만 은연중에 그리되었다. 엄마는 불쾌한 기억이 있는 동네를 떠나고 싶어 했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그런 건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뻔한 일이니까.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쾅!’
거세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와 현관에 매달린 작은 종이 자지러지며 울어댔다. 귀에 거슬리는 종소리와 함께 엄마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불쾌한 기운을 폴폴 풍겼다. 과외를 하던 나와 선생님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종소리가 잦아든 후에도 집 저편에서 웅얼대는 형태로 나와 선생님을 불안하게 했다.
“선생님, 잠깐 장실 좀.”
나는 화장실을 핑계 삼아 거실로 나왔다. 엄마는 안방에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은희야, 이거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 같은 걸로 걸 수 없니? 이렇게까지 동네 학부모들 지적 수준이 낮을 줄은 몰랐다. 질 떨어져서 이 동네에서 진짜 못 살겠어.”
차분하던 엄마는 나날이 안색이 나빠졌다. 동네 엄마들의 수모를 참기가 힘들었던 듯 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가 나에게 이사와 유학 중 택일하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시작한 것이. 며칠을 버티고 버티다가 나도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의 냉대는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었지만 엄마의 냉대는 참을 수 없었다.
처음, 엄마는 내게 유학을 권했다. 함께 미국에 가자고. 어차피 대학에 가더라도 어학연수도 해야 할 거고 유학도 갈 거니 차라리 빨리 가자고 했다.
유학은 싫었다. 유학을 가버리면 내가 그놈들한테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난 놈들에게 맞고 괴롭힘을 당하고 어이없는 짓을 당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놈들한테 고개를 숙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녀석들이 끈질기게 괴롭힌 건지도 몰랐다.
난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들에게 무릎까지 꿇은 건 아니었다. 유학을 가버리면 순순히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나에게, 또 그들에게. 그놈들에게 절대 진 게 아님에도 진 것이 되어버리니까. 그놈들에게 내가 항복했다는 기쁨을 안겨주기 싫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난 그들에게 진 것이 아니었다. 절대!
이사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사라는 것도 어찌 보면 내가 그들에게 져서 도망치는 꼴이었으니까. 엄마는 유학과 이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이사를 안 갈 거면 유학을 가라고. 아마 엄마도 힘들었으리라.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엄마들 사이에서 꼿꼿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쉬운 게 아님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거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