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궁지에 몰린 같은 반 학우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여유를 보였다. 나는 너무 친절했지만, 그 학우는 나의 배려를 원수로 갚았을 뿐, 그것뿐이었다. 어렵게 돌려 말한 것 같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난 왕따를 당하는 전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아이를 ‘따’로 만든 패거리가 나를 새로운 사냥감으로 지명했다. 그렇게 난 타깃이 되었고, 내가 손을 내밀었던 아이는 그 패거리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게 된 이야기다. 아주 구질구질한 삼류영화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
이사가 확정되고 엄마가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준비를 했다. 다시는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학교에 나가지 않는 시간 동안 선행학습과 더불어 유도를 배웠다. 유도는 어릴 때 꽤 오랫동안 배운 적이 있어서 새로 배우는 게 어렵진 않았다.
매일 저녁 유도장에서 실컷 땀을 흘렸다. 한겨울임에도 땀은 여름마냥 쏟아졌다. 마음속 밑바닥에 두텁게 자리한 수치심을 땀으로 닦아낼 정도로. 하루 4시간씩. 엄마는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나는 종일 집에만 있으니 체력이 떨어질 것 같다고 어물쩍 넘겼다. 체력이 떨어지면 공부하는 능률도 오르지 않으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땀을 바가지로 쏟아내고 운동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을 때조차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수치심이 반복되었다. 수치심이 구간반복 하듯 수천, 수만 번, 자꾸 재생되었다. 그렇게 잠이 오지 않는 날은 밤을 새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드디어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동안 흘린 땀은 내가 잃었던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었고, 난 더 이상 왕따가 아니었다. 겨우 몇 개월이었지만 운동 덕에 키도 커지고 근육은 단련되어 단단해졌다.
난 엄마의 자랑스런 엄친아로 되돌아갔다. 새로운 아이들과의 만남은 순조로웠다. 몇몇 아이들이 시비를 걸었지만, 방과 후 그 아이들과의 친근한 접촉(아주 친근한 주먹 교환이랄까)을 통해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다음날 난 우리 반에서 일진이 되었고, 며칠 후 몇몇 다른 반 아이들과 또다시 친근한 접촉이 있었다. 어이없게도 난 1학년 짱을 먹었다. 내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간 흐름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예전과 같은 엄친아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추억으로 삼을 만한 몇몇 해프닝도 있었다. 나름 순탄한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분홍빛 추억 만들기는 한때였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어 보충수업을 하던 한가로운 어느 날이었다.
학교 웹사이트에 문제의 그 동영상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동영상 조회 횟수는 학교 전체 학생 수보다 많아졌다. 전교 아이들 120%가 그 동영상을 본 것이다. 작년에 게시된 동영상은 인터넷이라는 선 없는 소문을 타고 그늘진 구석구석을 헤맸고, 엄마가 손을 썼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동영상을 올린 사람은, 내가 여유를 부리며 다시 친절을 베풀었던 동우였다. 우리 반 공식 빵셔틀, 동우. 나와 어울리는 아이들이 하도 동우를 부려먹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예전의 내 모습을 동우를 통해 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우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던 그 한마디가 나에게 다시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날,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동우를 따로 불러내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의 친절은 딱 거기까지였던 탓에 모른 척했다. 참고로 말하지만 난 더 이상 그런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낮에 내가 동우를 살짝 비호해준 것은 순전히 나의 센티해진 감정 탓이었다.
누군가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일은 비겁하고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막아설 정도로 용감한 바보는 아니었다. 난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아둔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