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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02-군장리(群場里)
  • 기사등록 2017-04-17 09:30:26
  • 수정 2017-07-14 14:5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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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02-군장리(群場里)


중천 김창현


추존(追尊) 원종대왕(元宗大王)은 선조(宣祖) 임금의 다섯째 아들로 순강원(順康園)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좌찬성 구사맹(具思孟; 군장리)의 따님 인헌왕후(仁獻王后)를 취하여 16대 선조 임금과 능원대군(綾原大君; 녹촌리), 능창대군(綾昌大君) 등 세 형제를 두었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을 몰아 낸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함으로서 능양군 종(綾陽君 倧)을 왕(王)으로 옹립하니 왕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은 대원군(大院君; 1623년)이 되었다가 1627년 원종(元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부인 구씨(具氏)도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되었다.

원종은 1619년 정원군 때 별세하니 군장리에 군(君)의 예장(禮葬)에 따라 장례를 치루었다. 군장리는 그의 처가(妻家) 마을이다.

인조(仁祖)가 집권하던 해에 정원대군(定遠大君)으로 올리고 부인 역시 연주부인(連珠夫人)으로 봉하고 묘호(墓號)도 흥경원(興慶園)과 육경원(毓慶園)으로 했다가 그 흥경원(興慶園)으로 합하여 불렀다.

인조는 반정(反正)을 한 다음 처음으로 어머니 구(具)씨를 대궐로 불러들인 다음 선조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별내면 덕송리)의 예(禮)에 따라 한 것과 같이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추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를 연주부인(連珠夫人)으로 올려 이현궁(梨峴宮; 광해군의 잠저)을 계운궁(啟運宮)으로 고친 다음, 옮겨 모셨다. 1626년 계운궁이 별세하자 묘호(墓號)를 육경원(毓慶園), 대원군의 묘(墓)를 흥경원으로 하였으니 군장리는 1627년 김포시 풍무리로 천장할 때 까지 원종(元宗)의 초장지인 흥경원이 있던 곳이다.

필자(고 임병규 남양주향토사료관 관장)는 1986년 군장리(群場里) 일대를 답사한 바 있는데 보통의 묘에서 볼 수 없는 석물(石物; 둘레석, 계단석) 등이 대량으로 쌓여 있어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문화원 사무국장으로부터 원종의 초장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원종대왕(元宗大王)의 직계 능원대군 가(家)의 종손 이우석(李愚錫) 회장께 문의한 결과 군장리설을 듣게 되었다.


또한 능성 구씨의 세장지 지근거리에 선조의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의 아버지인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 1526-1580)과 그의 아우 박응복(朴應福; 1530-1598), 형 박응천(朴應川; ?-1581),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 洪氏, 洪士俯의 딸)도 같은 곳에 묻혀 있으니 박씨는 당대 최고의 명문 집안이다.

반성부원군 박응순은 천성이 점잖고 검소한 선비로서 정치 쪽에 일체 간여하지 않고 당시 사람들은 국구(國舅)가 살아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청렴하였다. 몇 백년이 지난 현재의 정치는 어떠한가? 부끄럽고 또 부끄럽지 아니한가?

<추기>

박응천의 막내 아우인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박응인(朴應寅)의 장녀가 조정(趙玎)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 그 딸이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 군장리)에게 출가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그 아들이 구인기(具仁墍)로서 능풍군(綾豊君)에 봉해졌다.

아마도 이웃하여 살면서 통혼한 것이 아닐까?


글쓴이; 임병규(전 남양주향토사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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