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03-정가(鄭家)네 집터
그림 : 중천 김창현
오남저수지 끝자락 왼쪽 마을이 과라리(掛蘿里)요, 끝 집에서 천마산 과라리고개 중턱 쯤에 북창(北窓) 정렴(鄭磏; 1506-1549)과 그의 아우 고옥(古玉) 정작(鄭碏; 1533-1603)이 은거하던 집터가 있으니, 지금도 그 곳을 “정가네 집터”라고 부른다. 또 여기를 문막동(問莫洞)이라 하니, 사람들에게 묻지 말라고 한 뜻이다.
과라리고개를 넘으면 산수(山水)의 경치가 뛰어나고 아름다워 마을 입구에서 30여리를 뚫고 나와야 비로서, 대로(大路)를 볼 수가 있고, 그 옆에는 매금(埋琴)이라는 표시가 있었으나 이것이 지금의 남양주시 수동면(水洞面) 비금리(秘琴里)를 말하는 것이니 또 하나의 고적(古蹟)인 셈이다. 또 불기동(不棄洞)과 전자동(傳子洞)이 있는데 그 지은 뜻을 생각해보면 산에 들어간 것이 깊지 않을까 염려하고 자식들에게 전할 계획을 한 듯하다.
두 형제의 부친은 정순붕(鄭順朋; 1484-1548)으로 우의정을 지냈으나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에게 아부하여 세인으로부터 원흉의 한 사람으로 지목받았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인 뒤 유관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대개의 사람들이 악(惡)을 행함에 있어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는 남을 시기하고 음험하여 남을 죽이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것이 악(惡)인줄 알면서도 권력의 위력 앞에 겁을 먹어 악(惡)을 행하는 자이니 정순붕(鄭順朋)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아버지의 행실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정렴(鄭磏)은 포천현감을, 아우 정작(鄭碏)은 이조좌랑에 이르렀으나 아버지의 과거 전력이 세인의 지탄을 받게 되자 천마산(天麻山) 과라리에 터를 잡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여기서 연구한 처방들을 모아 1596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에 직접 참여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들은 두 정가(鄭家) 형제의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의 행실과 흡사하다고 생각된다.
정렴(鄭磏)과 정작(鄭碏) 형제와 같은 용기가 필요함이 절실한 때이기도 하다.
과라리에 정작(鄭碏) 부인 이씨의 묘가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길은 없다.
『청구야담(靑邱野談)』에 아래와 같은 정렴.정작 형제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정렴이 그 아우 정작과 함께 길을 가다가 한 집을 바라보고, “이 집안이 가련하게 되겠구나.” 하고 탄식했다. 이때 아우가 형에게, “형님께서는 말없이 지나갔으면 모르되 말을 하고서 어찌 그냥 지나갑니까” 하면서 언짢아했다. 정렴은 곧 “아우 말이 맞다” 하고 함께 그 집으로 들어가 묵었다. 이튿날 정렴은 주인에게 백탄(白炭) 50석을 구해 뜰에 불을 피우라고 했다. 이 광경을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와 구경하는데, 주인집의 10여 세 된 아들도 나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정렴은 종을 시켜 큰 나무상자를 가져오라고 하고, 주인 아들을 그 궤 속에 넣고 뚜껑을 닫고는 불 속에 올려놓았다. 주인과 집안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리고 소란을 피웠으나 정렴의 호령에 모두 말리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얼마 후 불 속에서 그 궤를 꺼내 뚜껑을 여니, 거기에는 큰 구렁이가 타서 죽어 있었다. 정렴이 그 구렁이의 살을 뒤져 작은 쇳조각을 찾아냈는데, 주인은 50년 전쯤에 기르던 물고기를 잡아먹던 구렁이를 낫을 휘저어 죽였는데, 그때 부러진 낫토막 같다고 말했다. 종을 시켜 창고에서 그 때의 낫을 가지고 오라 해 맞추어 보니 부러진 자리에 꼭 맞았다. 정렴은, “그 구렁이가 원수를 갚으려고 아들로 태어나, 얼마 후 집안에 재앙이 들어 망하게 하려 하는데, 지금 집에 그 악기(惡氣)가 서려 있어서 지나다가 보고 들어온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