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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마지막회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나고 병실 문이 열렸다. 동우였다. 그가 동우인지는 당연히 알았다. 하지만 난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르는 체 했다. 그게 더 나았다. 쪽팔리지 않으니까.“재우야, 미안하다. 그 동영상, 내가 올린 거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라면 내 마음을 알아줄 것 같았어. 나 죽으려고 했었거든. 그런데 네 동영상 보니까 죽을 수가 없었어. 나는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거든. 너는 나보다 더 심하게 당했으니까, 너는 내 마음을 알 것 같았어. 그래서 그랬는데... 그런데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화가 나서. 미안해, 네가 유일한 사람이었어. 나 괴롭히지 말라고 말해준 사람이. 너 뿐이었어. 그런데, 너한테 그렇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동우는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난 그 눈물을 믿진 않았지만. (앞으로 타인의 진심을 믿을 수 있을까?) 울지 말라고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난 그를 모르는 사람이니까.“저기, 울지 마세요. 그런데 누구세요? 저 알아요?”
은실
20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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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8
내 진지한 물음은 비웃음이 되어 돌아왔다. 그곳에 모인 모두가, 심지어 복도에서 까치발을 하고 있는 아이들까지, 모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비웃음은 내 귀를 찢고 내 진심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연성이가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미쳤냐?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난 너 같은 변태새끼랑 친구 먹은 적 없는데? 니가 싸움 좀 하니까, 대충 데리고 다녀준 거야. 너 같이 눈빛 사나운 새퀴랑 누가 친구를 먹어~!”그때 어디선가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맞아. 저 새끼 눈빛 열나 짱나. 완전 버려진 개새끼 같애. 옆에만 있어도 물어뜯을 것처럼. 열나 재섭써!”여기저기서 재수 없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처음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엄마가 왜 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봤는지, 왜 가끔 엄마가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흘렸는지.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엄친아가 아니었다. 나는 상처 입은 사나운 들개였던 것이다. 살아남으려 발악하는 사나운 개새끼.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착각이 얼마나 심했던가. 폭발 직전의 감정은 좀 전보다 더욱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때 어디선가 또 다른 목소리가 던져졌다.“야, 여기서도 한 번 해봐, 스트립쇼. 보니깐 완전 잘 하던데? 이왕이면 마스터베이션까지 보여주면 좋고! 그러면 앞으로도 친구해줄게. 대신, 매일 전교에 빵 돌려라. 푸하하하.”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나는 가까스로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쳤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나를 비웃는 아이들 모두를, 정말이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난 폭주해버렸다. 연성이나 연호가 아닌, 모두를 향해 주먹과 발길질을 날렸다. 누가 맞는지, 누가 날 때리는지, 남에게 타격을 주는지, 내가 타격을 받았는지, 아무것도 분간이 가질 않았다. 무아지경이었다. 달아오른 얼굴처럼 머릿속도 내 주먹도, 내 마음도 상처로 붉어졌다.얼마나 그렇게 정신을 놓고 싸웠을까. 처음엔 들리지 않았지만, 내 무의식을 파고드는 엄마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채자, 그제야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교실은 아수라장이었다. 내 주위에 있던, 또는 나를 공격했던 아이들은 엉망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 손에는 너덜너덜한 의자가 들려 있었다. 교실 뒷문 옆에 걸려 있던 전신거울에는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낸 채 핏발 선 눈으로 거울을 노려보는 들개 한 마리가 보였다. 그것이 진정 나의 모습이었을까.다음 날.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며칠 동안 엄마는 나 몰래 울었다. 엄마의 눈물이 내 방을 적실 때마다 나 또한 울었다.그날의 사건은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활자화 되지는 않았다. 모두 아버지의 능력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유래가 없던 큰 사건이라, 인터넷에라도 오를 만 했지만, 전혀 오르지 않았다. 다친 아이들에게는 모두 치료비 명목의 제법 큰돈이 지급되었고, 변호사를 통해 기사화 하지 않겠다는 합의 각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인터넷에 나돌던 동영상은 수십 명의 사람을 고용해 모두 찾아내 삭제를 했다(하지만 모른다. 또 언제 튀어나올지. 인터넷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으니까.)고 한다. 그렇게 내 인생의 오점은 타인의 손가락에 의해 삭제됐다. 하지만 내 마음속 상처까지는 삭제할 수 없었다.결국 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거창한 이유로 병원에 입원했다. 과연 내 마음은 전과 같이 온전해질 수 있을까? 난 매일 되돌아본다, 치유라는 이름으로. 매일 상담사에게 그날의 상처를 헤집어 보여준다.난 잊고 싶다. 더 이상 들추고 싶지 않다. 제발 치유를 빌미로 내 상처를 돌아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난 며칠 전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쪽이 더 수월하고 편했다. 억지로 소리를 내어 그날의 아픔을 끄집어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은실
20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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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7
‘동우’가 내가 되는 일은 한순간이다.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어쨌든 그때(어쩌면 나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동우는 자살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몇 번이나 생각했으니까.) 동우는 며칠 동안 학교를 안 나왔고, 난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내 관심 밖이었다. 며칠 후 등교한 동우는 나에게 대놓고 말했다. 도와달라고. 하지만 난 대놓고 동우를 지켜줄 생각이, 용기가 없었다. 다시는 머리 검은 동물에게 과대한 친절을 베풀고 싶지 않았다. 학교는 나 혼자 버티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벅찬 곳이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그 때문이었을까? 동우는 나의 거절을 신호탄 삼아, 그날 밤 그 동영상을 학교 웹사이트에 올렸다. 난 동영상이 올라갔단 사실도 모르고 보충수업을 들으러 등교했다. 그리고 마주쳤다,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두려움과.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내 목을 졸랐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발뒤꿈치를 살살 간질였다. 등교하는 내내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나를 깔보고 무시하는 듯한 그 눈빛. 내가 따돌림을 받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그 불길한 기운은 종아리를 타고 목덜미까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교실 문을 열었을 때, 모든 게 분명해졌다. 내 책상과 의자가 없었다. 왈칵, 두려움이 바짝 얼굴을 디밀었다. 내 자리에는 쓰레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공포가 실재가 되어 나를 노려보았다.어울리던 패거리 중 한 명인 연성이가 나에게 지분거렸다.“변태쓰레기! 너 그동안 운동 좀 했나보드라? 알아봤더니, 너 이 새퀴, 전교 빵셔틀이라며? 근데 이 새퀴가 그동안 나랑 어울려? 이게 완전 죽을라고!!”연성이의 주먹이 당황한 나의 빈틈을 노리고 재빨리 들어왔다. 내 정신은 붕괴 중이었지만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녀석의 주먹을 흘리고 덥석 연성이의 목울대를 움켜쥐었다. 연성이의 얼굴이 예전 나를 괴롭히던 패거리의 얼굴과 겹쳐졌다. 내 손아귀 안에 잡힌 사람은 더 이상 연성이가 아니었다. 악귀였다.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 구경하는 아이들이 어, 어, 하며 술렁이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악귀는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버둥댔지만, 나는 손아귀를 놓지 않았다. 연성은 나에게 경동맥을 눌려, 얼굴이 점점 시퍼렇게 변했다. 그의 쌍둥이 형 연호가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안면에 가해진 얼얼한 폭력의 울림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연성이를 붙잡았던 손의 힘을 뺐다. 연성이의 목덜미에는 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켁켁 대던 연성이는 호흡이 진정되자 쪽팔렸던지 더욱 화를 내며 내게 덤볐다. 연호도 연성이와 함께 맞섰다. 교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고, 싸움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곧 교실은 싸움을 구경하려는 아이들로 가득 찼다.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으로 교실은 터질 듯 했지만, 공포에 짓눌려 파닥거렸던 내 심장은 천천히 원상태로 복귀되고 있었다. 붕괴되던 머릿속도 차분히 가라앉은 반면 억눌린 감정은 폭발 직전이었다. 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차갑게 물었다.“왜 이래?”호흡이 정리되지 않은 연성이 대신, 연호가 대꾸했다.“너 화면빨 잘 받더라? 너 그동안 우리랑 맞먹으니까 좋았냐? 서울 빵셔틀이 지방에 오면 짱 먹을 줄 알았어? 서울에서 셔틀이면, 여기서도 셔틀이야!”연호는 아이들을 향해 과장된 눈짓을 하며 복도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다. 또 하나의 악귀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아이들이 악귀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교실 가득 모여 있던 아이들 모두 그 동영상을 봤다는 것을.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숨고 싶었다. 아무도 내 얼굴을, 내 그림자까지도 보지 못하도록.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여지가 없었다. 주변을 꽉 매운 적대적인 눈빛 사이에는 송곳 꽂을 틈도 없었다. 남은 선택은 정면대결 뿐.“우리 친구 아니었냐?”
은실
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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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6
난 궁지에 몰린 같은 반 학우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여유를 보였다. 나는 너무 친절했지만, 그 학우는 나의 배려를 원수로 갚았을 뿐, 그것뿐이었다. 어렵게 돌려 말한 것 같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난 왕따를 당하는 전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아이를 ‘따’로 만든 패거리가 나를 새로운 사냥감으로 지명했다. 그렇게 난 타깃이 되었고, 내가 손을 내밀었던 아이는 그 패거리의 일원이 되었다. 그렇게 된 이야기다. 아주 구질구질한 삼류영화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이사가 확정되고 엄마가 이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준비를 했다. 다시는 내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학교에 나가지 않는 시간 동안 선행학습과 더불어 유도를 배웠다. 유도는 어릴 때 꽤 오랫동안 배운 적이 있어서 새로 배우는 게 어렵진 않았다. 매일 저녁 유도장에서 실컷 땀을 흘렸다. 한겨울임에도 땀은 여름마냥 쏟아졌다. 마음속 밑바닥에 두텁게 자리한 수치심을 땀으로 닦아낼 정도로. 하루 4시간씩. 엄마는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하는 게 어떠냐고 말했지만 나는 종일 집에만 있으니 체력이 떨어질 것 같다고 어물쩍 넘겼다. 체력이 떨어지면 공부하는 능률도 오르지 않으니까.잠을 제대로 못 잤다. 땀을 바가지로 쏟아내고 운동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을 때조차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수치심이 반복되었다. 수치심이 구간반복 하듯 수천, 수만 번, 자꾸 재생되었다. 그렇게 잠이 오지 않는 날은 밤을 새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드디어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동안 흘린 땀은 내가 잃었던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었고, 난 더 이상 왕따가 아니었다. 겨우 몇 개월이었지만 운동 덕에 키도 커지고 근육은 단련되어 단단해졌다.난 엄마의 자랑스런 엄친아로 되돌아갔다. 새로운 아이들과의 만남은 순조로웠다. 몇몇 아이들이 시비를 걸었지만, 방과 후 그 아이들과의 친근한 접촉(아주 친근한 주먹 교환이랄까)을 통해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다음날 난 우리 반에서 일진이 되었고, 며칠 후 몇몇 다른 반 아이들과 또다시 친근한 접촉이 있었다. 어이없게도 난 1학년 짱을 먹었다. 내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간 흐름이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예전과 같은 엄친아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이들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추억으로 삼을 만한 몇몇 해프닝도 있었다. 나름 순탄한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분홍빛 추억 만들기는 한때였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어 보충수업을 하던 한가로운 어느 날이었다.학교 웹사이트에 문제의 그 동영상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동영상 조회 횟수는 학교 전체 학생 수보다 많아졌다. 전교 아이들 120%가 그 동영상을 본 것이다. 작년에 게시된 동영상은 인터넷이라는 선 없는 소문을 타고 그늘진 구석구석을 헤맸고, 엄마가 손을 썼을 땐 이미 늦은 시점이었던 것이다.동영상을 올린 사람은, 내가 여유를 부리며 다시 친절을 베풀었던 동우였다. 우리 반 공식 빵셔틀, 동우. 나와 어울리는 아이들이 하도 동우를 부려먹기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예전의 내 모습을 동우를 통해 보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우를 괴롭히지 말라고 했던 그 한마디가 나에게 다시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날,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동우를 따로 불러내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의 친절은 딱 거기까지였던 탓에 모른 척했다. 참고로 말하지만 난 더 이상 그런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낮에 내가 동우를 살짝 비호해준 것은 순전히 나의 센티해진 감정 탓이었다. 누군가를 집단으로 괴롭히는 일은 비겁하고 천박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막아설 정도로 용감한 바보는 아니었다. 난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아둔한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은실
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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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5
마음의 상처보다 더 나를 할퀸 것은 ‘쪽팔림’이었다. 내가 그 아이들의 장난감인양 휘둘렸던 것도 싫었고, 그렇게 맥없이 당했다는 것도 싫었다. 나름 운동도 했으며 전교에서 놀던 성적, 매번 회장도 했었다. 난 모든 아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몇 아이들에게는 엄친아,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니, 그랬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한순간에 엎어졌다.그날 이후 난 학교에 가지 않았다. 기말시험은 이미 하던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혼자 공부했고, 시험은 상담실에서 상담선생님의 감독으로 따로 시험을 봤다. 그 외 수업일수나 그런 것은 엄마가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그렇게 난 조용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물론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다. 졸업앨범이 배달됐지만, 난 택배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재활용품 수거함에 던져버렸다.아버지는 내가 기말시험이 끝나고 일이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 들어왔다. 평소에도 쉽게 말 붙이기 힘든 아버지였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 아버지는 더욱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와 아버지의 싸움도 더 이상 없었다. 그저 서로를 향해 냉랭한 기운을 내뿜을 뿐이었다.이사를 갔다. 서울에서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작은 지역으로. 아버지는 서울에 그대로 머물렀고 난 엄마와 함께였다. 아버지와 엄마의 공식적인 별거 상황까지는 아니겠지만 은연중에 그리되었다. 엄마는 불쾌한 기억이 있는 동네를 떠나고 싶어 했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학부모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그런 건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뻔한 일이니까.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쾅!’거세게 닫히는 현관문 소리와 현관에 매달린 작은 종이 자지러지며 울어댔다. 귀에 거슬리는 종소리와 함께 엄마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불쾌한 기운을 폴폴 풍겼다. 과외를 하던 나와 선생님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엄마의 목소리는 종소리가 잦아든 후에도 집 저편에서 웅얼대는 형태로 나와 선생님을 불안하게 했다.“선생님, 잠깐 장실 좀.”나는 화장실을 핑계 삼아 거실로 나왔다. 엄마는 안방에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은희야, 이거 명예훼손이나 허위사실 유포 같은 걸로 걸 수 없니? 이렇게까지 동네 학부모들 지적 수준이 낮을 줄은 몰랐다. 질 떨어져서 이 동네에서 진짜 못 살겠어.”차분하던 엄마는 나날이 안색이 나빠졌다. 동네 엄마들의 수모를 참기가 힘들었던 듯 했다. 그때부터였다. 엄마가 나에게 이사와 유학 중 택일하라고 강요 아닌 강요를 시작한 것이. 며칠을 버티고 버티다가 나도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의 냉대는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었지만 엄마의 냉대는 참을 수 없었다.처음, 엄마는 내게 유학을 권했다. 함께 미국에 가자고. 어차피 대학에 가더라도 어학연수도 해야 할 거고 유학도 갈 거니 차라리 빨리 가자고 했다. 유학은 싫었다. 유학을 가버리면 내가 그놈들한테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난 놈들에게 맞고 괴롭힘을 당하고 어이없는 짓을 당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놈들한테 고개를 숙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녀석들이 끈질기게 괴롭힌 건지도 몰랐다. 난 그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들에게 무릎까지 꿇은 건 아니었다. 유학을 가버리면 순순히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나에게, 또 그들에게. 그놈들에게 절대 진 게 아님에도 진 것이 되어버리니까. 그놈들에게 내가 항복했다는 기쁨을 안겨주기 싫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난 그들에게 진 것이 아니었다. 절대!이사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사라는 것도 어찌 보면 내가 그들에게 져서 도망치는 꼴이었으니까. 엄마는 유학과 이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이사를 안 갈 거면 유학을 가라고. 아마 엄마도 힘들었으리라.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엄마들 사이에서 꼿꼿한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쉬운 게 아님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거였으니.
은실
2016-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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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4
까무룩 잠이 들었나보다. 엄마의 노크 소리에 무심코 일어나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딸깍’ 소리가 나자 후다닥 정신이 들었다.문이 왜 잠겼지? 뭐야. 나 잔 거야? 나 진짜 노답이다. 내가 지금 뻔뻔하게 엄마한테 낯짝을 들이밀 상황이 아니잖아!그렇다고 이미 열어버린 문짝을 도로 닫을 수도 없었다. 학교에는 가야 했으니까. 엄마가 불미스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학교를 가지 말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나는 얼굴을 푹 숙이고 욕실로 향했다.“재우야, 잠깐 이리 와봐.”엄마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엄마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엄마는 나를 보지 않고 식탁만 응시하고 있었다. 엄마의 눈을 보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손끝이 찌릿해졌다. 나는 엄마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럴 때 노는 애들처럼 머리카락이라도 있었으면 얼굴을 가릴 수 있었을 텐데. 내 짧은 머리카락은 이마조차 가려주질 못했다.“재우야, 당분간은 학교에 안 가도 돼. 일 처리 될 동안 집에서 공부해. 과외 선생님 불러줄 테니까. 그리고 기말시험은 학교에서 혼자 받을 수 있도록 할 거니까 내신 걱정 말고. 어차피 이번 기말만 치르면 졸업이니까, 졸업 때까지 학교 안 가도 될 거야. 그리고….”엄마가 말을 멈추자 집안 가득 적막이 깔렸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려고 말을 멈췄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동영상 얘기겠지. 전신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 변호사이모가 알아보니까, 그런 거 전문적으로 삭제해주는 업체가 있대. 거기서 전부 다 삭제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거 찍은 애랑 그거 올린 애들 모두 핸드폰에서 동영상 없애버릴 거고. 그니까 재우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니? 재우 네가 원한다면 심리상담치료 알아볼게.”엄마의 목소리에서 불편한 기색이 읽혀졌다. 아마도 엄마는 싫겠지. 자식을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한다는 게 내키지 않으리라.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나 아무렇지도 않아.”“다행이다.”엄마가 안도했다. 내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씁쓸함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어쩌면 엄마는 아버지에게 아들의 정신과 상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란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나는 엄마가 원하는 바에 맞춰주기로 마음먹었다. 엄마가 바라는 바에 응해줘야 더 이상 내가 귀찮아지지 않을 테니까. 수시로 내 행동을 살피고 이상한 짓은 안 하는지 관찰당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감시당하는 기분. 그건 학교에서 그 녀석들한테 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럼 씻고 와. 밥 먹고 공부하렴. 엄마가 오늘 과외선생님 알아보고 내일부터 오라고 할 테니까.”나도 엄마를 끝까지 제대로 보지 않았고 엄마도 나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우린 서로를 피했다. 엄마도 알고 나도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랄까.이후 모든 조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가 지닌 권력의 힘이 컸던지, 아니면 변호사이모의 실력이 좋았던 건지, 학교 일은 엄마가 말했던 대로 흘러갔다.내가 아팠던 만큼 그들도 아프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런 욕망보다는 수치심이 더 컸다. 그들을 아프게 하려면 직접 대면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내가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자신의 아들은 꿋꿋하게 이겨내고 있다고 여겼다. 자신의 아들은 엄친아였으니까. 아버지는 계속 부재중이었다.
은실
201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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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3
수능. 논술. 과연 내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면서 수능을 볼 수 있을까? 무사히 수능을 보고 논술까지 치를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할까? 동영상 때문에 이미 내 신상은 퍼질 대로 퍼졌을 텐데. 이대로 매장 당할 수도 있었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더라도 소문은 여기저기 나 있겠지. 거기서도 따돌림을 받으면? 그땐 어디로 가나. 차라리 자퇴를 하고 싶었다. 검정고시를 보고 수능을 치르면 잘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 엄마도 달가워하진 않을 테고. 결국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데. 아, 정말 학교 가기 싫다.그런데 이상하다. 엄마는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칼 같이 내 방문을 노크했다. 깨울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 걸까. 그게 더 불안했다. 엄마는 정해진 규칙을 깨는 걸 무척 싫어했으니까.엄마는 언제 일어날까? 새벽 늦게까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래서 늦잠을 자는 걸까. 엄마가 늦잠을? 그럴 리가. 엄마는 늦잠을 자는 법이 없는 분인데. 그럼 왜? 나는 귀를 바짝 세워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조용했다. 엄마가 일어나 움직이는 소리나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재빨리 몸을 반대로 돌렸다. 오랫동안 한쪽으로만 누워 있는 바람에 매트리스와 맞닿은 곳은 아예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다시 밖의 상황을 예민하게 살폈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기척은 없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엄마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문을 잠글까? 왜 그 생각을 못했지?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며 이불을 살짝 내려 눈만 나오게 했다. 방문 문고리가 보였다. 볼록 튀어나온 것만 살짝 누르면 되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일어나 방문을 잠그는 사이 엄마가 문을 열면 어쩌지?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수많은 뇌세포가 당시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며 나를 괴롭혔다.잠글까? 말까?이 단순한 명제를 고민하며 잠깐이지만 식은땀까지 흘렸다. 문을 사이에 두고 엄마를 마주할 상황은 ‘끔찍함’ 그 자체였으니까. 최근 엄마의 키를 앞지르긴 했지만 눈높이가 서로 비슷했기에 엉거주춤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는 상상은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이지만 너무나 현실적이었다.뇌가 만들어낸 상상 때문에 빨리 뛰던 심장이 가까스로 차분해지자 이성적으로 사고가 가능해졌다. 엄마는 내가 방에 있을 때는 항시 노크를 했고 방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내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함이었고 사춘기 아들을 위한 배려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엄마가 언제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나를 책망하고 꾸짖을 것만 같았다.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왜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하고 있었니? 네 아버지도 집에 안 들어오잖아. 모두 다 너 때문이야. 넌 왜 이렇게 애가 모자라니? 엄마의 질책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눈을 꼭 감았지만 엄마의 화난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엄마를 만날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누워만 있어서는 답이 안 나왔다. 문을 잠그고 그나마 편한 마음으로 있는 게 나을 터였다.나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밖의 동태를 살폈다. 아무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이불을 살짝 내리고 온몸에 날카로운 긴장감을 불어넣은 후 후다닥 움직였다. 다섯 걸음만 걸으면 바로 문인데도 그 거리가 학교 운동장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문까지 달려가 조심히 문고리의 꽁다리를 꾹 눌렀다. 그제야 배꼽 아래에서부터 참고 있던 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몸의 긴장이 쭈욱 빠져나갔다.안심이었다. 엄마가 억지로 문을 열지 않는 한 나는 혼자였고 자유였다. 그 누구에게도 처참한 내 꼬락서니를 내보일 필요가 없었다. 나는 혼자 있고 싶었다.
은실
201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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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2
그날 밤, 엄마는 나를 힘껏 안아줬다. 괜찮다고 속삭이며. 난 괜찮지 않았지만 평소 엄마의 행동양식에서 벗어난 살가움에 의아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한 새벽. 나는 잠들지 못했다. 학교에 갈 생각을 하면 심장이 벌렁거렸고 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은 엄마와 변호사이모 덕에 수업을 모두 재낄 수 있었지만 내일은 아무래도 학교에 가야겠지?엄마는 내가 학교나 학원에 결석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파도 학교에서 아파야 했고 쓰러지더라도 학원에서 쓰러지는 게 엄마의 교육 철학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성실함에 대해서도 엄격한 분이었다. 나는 학교 갈 걱정에 눈이 감기질 않았다. 눈만 감으면 나를 둘러싼 놈들의 비웃는 눈빛이 떠올랐다. 새벽이 짙어질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든 걸 엄마의 탓으로 돌리는 듯 했다. 아마 일이 해결될 즈음 들어올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다.아버지는 나를 못마땅해 하겠지? 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구제불능이라고 여길까?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이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였다. 엄마의 눈물은 닫힌 방문 틈새를 비집고 흘러 들어와 방바닥을 적셨다. 아무래도 엄마가 문제의 그 동영상을 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봤겠지. 안 본 게 이상한 거겠지. 언제쯤 봤을까? 논리적인 엄마니까, 어제 내가 고백한 후에 바로 찾아봤을 게 틀림없었다.내일 아침 엄마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엄마와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저녁에 나를 안아주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니 엄마가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던 것도 같다. 변호사이모도 친절했지만 나를 보는 눈빛에는 연민이 가득했던 것도 같다. 모두 그 동영상을 봤기 때문이겠지. 내일 아침 해가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이불 밖으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그러면 내일 일어나서 엄마를 보지 않아도 될 텐데. 이대로 눈을 감은 채 지구가 멸망했으면, 북한이든 중국이든 미사일을 쏴서 전쟁이 터졌으면, 서울에 지진이 났으면, 이 아파트가 폭삭 무너졌으면. 끝도 없는 바람이 머릿속을 좀먹었다.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침 해는 유난히 일찍 떠올랐다. 엄마를 어떻게 보지? 엄마는 나를 더럽다고 생각하겠지? 날 이상한 놈이라고 그 지경이 되도록 아무 말도 못하는 멍청하고 한심한 놈이라고?나는 이불을 들추지도 못하고 잠든 척했다. 이불이 들썩일까봐 숨을 최대한 죽이고 발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머리카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 잔뜩 힘이 들어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고 호흡은 가빠졌지만 참았다. 그런 건 현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엄마의 꾸짖는 눈을 피할 수만 있다면 평생 이불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차라리 그레고르 잠자처럼 흉측한 벌레로 변신했다면 좋았으리라. 그랬다면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괴로움을 겪지는 않았을 텐데.그레고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을 무섭고 징그럽게 여기며 방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엄마를 바라보던 그레고르의 마음은? 이대로 눈을 감고 죽어버리고 싶은 내 마음과 비슷했겠지?그레고르를 징그러운 바퀴벌레로 만든 작가인 프란츠 카프카는? 카프카 자신도 나처럼 따돌림을 받았으려나? 혼자만 이상한 벌레로 취급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았던 걸까. 그 작가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왠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경험이 없었다면 그런 대단한 소설을 쓰지는 못했을 테니까.문득 수업시간에 배웠던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이 떠올랐다. 수업 중 국어쌤이 수능이나 논술에 종종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덩달아 기억났다.
은실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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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기억을 잃어버렸다_1
잊고 싶었다, 내가 왕따였다는, 내가 그 녀석들의 노리개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애썼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들이 내 동영상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사이트에 접속해 동영상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나에겐 권한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되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했다. 고민하는 사이 동영상의 조회수는 커져갔다. 더 이상 물어뜯을 손톱이 없었다. 열손가락 손톱 모두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멍하니 손톱을 응시하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동영상은 낯모르는 이들의 클릭으로 광활한 인터넷 세상 곳곳으로 퍼 날라지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촬영한 조악한 영상이라도 얼굴이 드러나고 신체 일부가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동영상이었다. 막아야 했다!엄마에게 털어놨다. 그동안 내가 겪을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일들을. 태어나서 가장 창피하고 수치스러운 시간이었다. 괴롭힘을 당하던 시간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엄마에게 사실을 밝히는 시간이 내겐 더욱 큰 고통이었다.처음, 엄마는 당황했다. 자신의 엄친아, 모범생 아들이 왕따라는 사실이 엄마를 당황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각한 수준의 왕따는 아니라고, 설마 잘난 내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으리라. 엄마의 강한 자존심은 루저 아들을 용납할 수 없었을 테니.내 고백을 들은 엄마는 굳은 얼굴로 내 등을 토닥였다. 알아보마, 했다. 엄마는 차분히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상의했다. 처음엔 엄마의 절친한 여동생인 이모였고 그 다음엔 엄마의 친구인 변호사이모였던 것 같다. 이후엔 학교 선생님들인 듯 했다. 아버지는 가장 나중이었다. 한밤중에 퇴근한 아버지에게 엄마가 내 얘기를 했을 때 아버지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대체 집에서 뭐하는 거야?! 문화센터다, 마사지다, 뻔질나게 놀러 다니기만 한 거야? 겨우 아들 하나 있는 거 그것도 제대로 간수 못해? 5대독자야, 5대독자! 크게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아버지와 엄마는 새벽까지 언쟁을 벌였다. 결국 아버지는 서재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엄마는 나와 변호사이모를 대동하고 학교로 갔다. 교장과 담임은 엄마의 분노에 반박할 수 없었다. 변호사라는 든든한 아군은 교장과 담임의 잘못된 학생 지도에 대해 법 조항을 조목조목 짚으며 열거했고 교장과 담임은 선고 받은 죄인처럼 묵묵히 앉아 있었다.이 싸움에서 나는 볼모였다. 싸움을 진두지휘하는 엄마와 참모장인 변호사이모는 교장과 담임에게 나와 나의 동영상을 들먹이며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변호사이모가 논리적으로 잘잘못을 따지는 사이사이 엄마는 언성을 높였다. 감히 귀한 아들을 왕따로 만든 천하의 나쁜 놈들과 그들을 방관한 무능한 선생들을 향해. 엄마가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다. 평소 엄마는 차분하고 냉철한, 논리정연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난리통에서 나는 궁금해졌다. 엄마는 무엇에 화를 내는 걸까?사랑하는 자식이 괴롭힘을 당한 것에 대한 엄마로서의 당연한 모정 때문이었을까? 엄친아를 둔 엄마로서의 경력에 지워지지 않는 흠집이 났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완벽한 가정(잘나가는 대기업의 임원인 남편과 전국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공부 잘하는 아들, 먼지 한 톨 앉을 자리 없는 집안 살림솜씨를 가진 엄마)이 무너지는 슬픔 때문이었을까?
은실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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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마지막 회
“그러게요.”“그래서? 그래서 잘 처리 된 거야?”“교환도 필요 없다, 그냥 가져가라고 하시네요.”“블랙?”“아뇨. 브이브이아이피(vvip)였어요.”박팀장의 놀란 눈빛은 나에게 잘 했냐고 묻고 있었다.“실제 vvip는 시어머님이시고 전화 주신 분은 며느리분이셨어요. 거위 털 알러지가 있다고 알러지가 생긴 이유를 한참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좀 길어졌어요.”“그래. 힘들었겠네. 수고했어. 밥 아직 안 먹었지? 배고프겠다. 빨리 가서 먹어.”박팀장의 사근사근한 말에 깜빡 넘어가면 안 되지만 팀장의 걱정스런 목소리와 눈빛은 진심을 담은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나 팀장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해서 8년을 갈고 닦았으니 얼마나 능수능란하겠는가. 정말 대단하다. 나도 대학을 안 가고 취업했다면 박팀장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사근한 목소리와 진심을 담은 눈으로 상대를 대할 수 있었을까?나는 아주 작은 부러움을 느끼며 얼른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지하 구내식당은 한산했다. 나는 식판에 가득 음식을 퍼 담았다.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허기졌는지, 채 세 번을 씹지도 않고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오늘따라 밥맛이 꿀맛이었다. 배가 채워지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에 스타벅스 카라멜마끼아또 벤티 사이즈 한 잔이면 오전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엔 충분하리라.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커피를 즐기니 더욱 기분이 업, 업, 업! 한껏 입술을 내밀고 셀카를 찍으며 즐기던 찰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고객님께서 1:1게시판에 남겨주신 문의에 답변이 달렸습니다.’얼마 전 구입한 그릇세트 때문에 문의를 남겼었다. 벌써 네 번째 교환이었다. 리퍼브 상품도 아니고 정품인데 왜 매번 나한테 오는 것만 자꾸 문제가 생기는 건지 이젠 화가 나기까지 했다. 답변도 뻔했다. 일반적인 답변. 전에 교환 요청 상담을 할 때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복장이 터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는 고객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곧 상담원이 연결되자 나는 작은 숨을 내뱉으며 적당한 하이톤으로 소리를 질렀다.“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예요?”
은실
201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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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9
아이는 바닥에 널브러진 나와 내 심장을 번갈아보더니, 나와 눈을 맞추며 내 심장에 작고 하얀 이빨을 박아 넣었다. 천천히. 아이는 작은 입 가득 심장을 베어 물고 오물거렸다. 하얀 얼굴 여기저기, 하얀 원피스 군데군데, 하얀 스타킹과 하얀 구두에까지 핏방울이 튀었다. 아이가 심장을 물어뜯을 때마다 아이의 키가 한 뼘씩 커졌다. 내 심장이 작아질수록 아이는 쑥쑥 커졌고 하얀 옷에 묻은 붉은 자국도 번져갔다. 마침내 아이가 내 심장을 다 먹어버리고 손바닥에 묻은 피를 핥아먹었다. 아이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다 큰 어른이 되어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어른 여자.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을까.잠시 고민하는 찰나 날카로운 비명이 내 고막을 꿰뚫었다.“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당장 이불 가져가라고요.”아차. 너무 딴생각을 했다. 고객의 불만을 기분이 좋아지게끔 적당히 해소시켜줘야 하는데.“고객님, 죄송합니다. 고객님께서 거위털이불을 구입하신지 두 달의 시간이 경과되어 상품 교환이 어려운 부분이 있으신데요. 아무래도 시일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제품판매사와 협의를 해야 하는 부분이어서요, 당장 확답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제가 이 부분을 확인한 후에 3시간 이내로 전화를 드려도 될까요?”“교환 안 해줘도 되요. 그냥 이불만 가져가세요.”“고객님, 거듭 죄송합니다. 교환이나 반품이 아닌 이상 저희가 이불만 수거하기는 힘듭니다.”“안 가져간다고요? 왜요? 나 이불 안 쓸 건데. 필요 없다고요. 저 이불 좀 치워줘요. 흐흐흐흑.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요.”버릴 거면 그냥 헌옷수거함이나 쓰레기장에 버리라고. 왜 여기까지 전화해서 저러는 건지. 답답하다, 답답해.“고객님, 혹시 제가 고객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걸 수도 있는데요, 이불을 버리려고 하시는 건가요?”“네. 맞아요. 우리집에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요.”“그렇다면요, 고객님. 주소지가 아파트이신 걸로 고객 정보가 등록되어 있으신데요. 아파트 쓰레기장 인근에 헌옷수거함이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이불을 버리시는 건 어떨까요? 이불을 버리시려는 거면 그게 가장 빠를 것 같습니다.”“그런가요? 아, 그런 게 있었군요. 고마워요.”설마. 이걸로 끝이야? 정말?“고객님, 또 다른 문의 사항이 있으신가요?”“아뇨. 됐어요. 시엄마는 그 이불을 좋아하니까 이불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놔둘게요. 고마워요.”“고객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오히려 제가 기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상담사 한지민이었습니다.”자, 이제 끝. 빨리 끊어라. 나 밥 먹으러 가야돼. 밥 좀 먹고 삽시다, 좀!전화 저편에서 멈칫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다렸다. 고객이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는 건 기본 중 기본이니까. 고객이 전화를 끊기 직전 작게 속삭였다.“내 얘기, 다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요.”뚜―.드디어 전화가 끊겼다. 나는 귀에 꽂은 헤드셋을 뽑아내듯 벗겨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솟았는지 축축했다. 이제 드디어 밥 먹을 시간이었다. 서둘러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지민씨. 어떤 고객이길래 50분이나 통화를 한 거야?”박팀장이었다. 저승사자. 나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20년은 더 많은 양 구는 뼛속까지 늙어버린 팀장.“아, 거위털이불 수거해달라고 하셔서요.”“이불? 두 달 전에 판매된 거? 오늘 그거 문의가 많네. 어젯밤에 SNS에 떴다더니. 그래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두 달이나 쓴 거를 지금 환불해달라는 게 제정신이야? 요즘 사람들 진짜 기본적인 상식이 없어요. 상식이. 지민씨, 안 그래?”
은실
201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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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8
“고객님, 죄송합니다만, 거위 털만 수거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상품으로 교환을 원하시는 건가요?”절대 ‘환불’이라는 단어를 먼저 쓰지 말 것. 박팀장이 누누이 강조하는 거다. ‘보상’이라는 말도 되도록 사용하면 안 되는 금기어다. 고객이 먼저 그런 단어를 쓰기 전까지는 먼저 말하는 건 소위 ‘호구’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게 우리 팀장의 지론이다. ‘교환’도 금기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팀장도 인정해 줄 거다. 거위 뿐만 아니라 날아다니는 모든 조류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소비자를 상대하는 건 꽤나 힘든 레벨이니까.회사에 득(得)이 되어야지 실(失)이 되면 안 된다. 고객상담실은 고객의 불만을 들어주고 적절히 해소시켜주는 곳이지, 절대 고객을 만족시켜주는 곳이 아니다. 고객상담실은 고객이 만족했다는 기분이 들도록 해주는 곳이다.우리 박팀장의 책상에 붙어 있는 표어다. 팀장의 말이 맞다. 세상에 어떤 기업이 고객들을 100% 완벽하게 만족시켜줄 물건을 만든단 말인가. 튼튼한 물건? 웃기네. 너무 튼튼하면 신제품이 어떻게 팔리겠는가. 적당히 2, 3년 정도 쓰다가 망가지도록 만들어야 새로 개발한 상품을 팔 게 아닌가.사람들이 물건을 사도록 유도하고 산 물건에 ‘만족을 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 몇 달만 지나도 금방 트렌드에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것. 이 모든 게 기업들의 판매 전략이다. 고객상담실도 기업의 판매 전략 중 하나다. 고객들을 위한 곳이라는 기분이 들도록 전화도 빨리빨리 연결되고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응대하는 것 모두 눈 가리고 아웅이랄까.“당장 이불 가져가. 교환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전부 니네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이불 속에 드러누운 시엄마도 가져가.”아, 결국 올 게 오고야 말았구나. 난감한 이 고객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할 터인데. 지금 내 뱃속에서는 배고프다고 거지가 울어대고 있고. 난 벌써 40분 째 고객의 소리만 귀담아 듣고 있으니. 하루가 더해져 경력이 늘어나면 고객 응대 노하우가 쌓이는 게 아니라 미간의 주름만 더 깊어졌다. 심장은 딱딱해지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은 냉소적이기만 하다. 회사에서 내일을 살아갈 월급을 받는 대신 나는 회사에 내 말랑말랑한 심장을 떼어주고 있었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망상 하나.난 캄캄한 무대 위에 서 있었다.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어도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 그때 무대 위로 떨어진 핀조명 한 줄기. 작은 여자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이 어색할 정도로 온통 하얬다. 등에는 몸뚱이만한 큰 날개를 달고 있었다. 하얀 원피스에 하얀 스타킹, 하얀 리본이 달린 구두를 신고. 예뻤다.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천사처럼. 아이는 붉은 입술로 깜찍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더니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가슴을 찢어냈다. 너무 놀라서 멍하니 찢겨진 가슴을 내려다보는 사이, 아이가 천진한 눈빛으로 작은 손을 내 벌어진 가슴 속에 찔러 넣었다. 아이는 가슴 속을 헤집어대더니 펄떡이는 심장을 뽑아냈다. 텃밭에 자란 잡초를 뽑아버리듯 인정사정없었다.좀 전까지 콩닥거리던 두근거림이 사라졌다. 가슴이 시렸다.나는 건전지가 떨어진 인형마냥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도 움찔거릴 수가 없었다. 새카만 천장이 보였다. 빛이라곤 오진 천사인지 악마인지 모를 작은 아이에게 떨어지는 핀조명 하나뿐이었다. 아이는 양손으로 꽉 움켜쥔 내 심장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섬뜩했다.
은실
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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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7
vvip 고객님, 제 밥시간은 지켜주셔야죠. (물론 비정규직에게 정확한 출퇴근시간과 점심시간 보장은 나라에서도 지켜주지 않지만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죠.) 제가 지금 엄청 배가 고프답니다. 빨리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여긴 성폭력상담소가 아니에요. 홈쇼핑 고객상담실이라고요. 제가 고객님께 강조하고 싶은 건 여긴 고객상담실이라는 겁니다. 설마 제가 끊지 않고 다 듣고 있다고 해서 저를 심리상담사로 착각하신 건 아니죠? 그것도 아니면 신부님으로 착각하시는 것도 아니죠? 전 고해성사를 받아줄 수도, 받아줄 심적 여유도 없답니다. 그렇잖아도 고달픈 제 어깨에 당신의 고단함을 얹진 말아주세요. 저는 지금 제 삶만으로도 충분히 괴롭고 고통스럽답니다. 긍정의 힘으로 가득한 사람들은 10년 후의 미래, 더 나아가 노후 계획까지 세우는 것 같던데요. 전 내일 하루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해요. 과연 내일 해가 뜰지도 모르겠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만 그건 저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의 말이랍니다. 그건 아메리칸드림이 성행하던 미국에서나 어울리는 말이고요. 현재 대한민국의 비정규직인 제게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랍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저에게 그런 여유 따윈 사치랍니다. 여자 대 여자, 인간 대 인간으로 당신의 아픈 상처에 대일밴드 쪼가리 하나라도 붙여주고 싶지만 제겐 그 값싸고 흔한 대일밴드 하나조차 버겁답니다.제가 묵묵히 당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도 팀장의 서슬 퍼런 눈빛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당신은 더욱 상처 받을 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당신이나 나나 벌레만도 못한 하루살이 인간들인데요. 누구한테 밟히고 짓이겨져도 어디에도 하소연할 데 없는 버러지들.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요. 저도 이제 밥 좀 먹고 짤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힘을 내야지요.“이제 확실히 아셨죠? 제가.왜.거.위.털.이.불.을.못.견.뎌.했.는.지?”아주, 명백하게,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거위털이불에 들어 있는 시체인지 시어머니인지는 경찰서에 전화하셨으면 좋겠습니다.“네, 고객님. 거위털이불이 별로셨다니 안타깝네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고객응대 매뉴얼대로 이야기를 돌려보고 애썼다. 진짜다. 녹음된 내용을 들으면 팀장도 놀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달의 우수사원으로 뽑힐 수도 있겠지. 아니다.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이름에 달린 C라벨을 B라벨로 바꿔줬으면.상담직원의 응대에 고객 불만이 접수되거나 해피콜 설문에서 받은 점수, 상관의 직원 평가 등으로 매달 상담직원의 등급이 매겨지는데, 나는 최하등급인 F라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일 높은 등급인 S라벨도 아니다. 평균인 B라벨이라도 달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불안에 떨며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될 텐데. 휴―. 오전에 팀장에게 찍힌 걸로 봐서는 이번 달도 C라벨을 벗어나긴 힘들 것 같다는 나의 예상이 빗나갔으면 좋으련만. 이런 예상은 결코 빗나가는 법이 없다.“거위털을 모조리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털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요. 절대로 이불에 거위 털이 하나도 있으면 안돼요. 알았죠?”
은실
201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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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6
깜짝이야. 고객님, 진정하세요. 갑자기 그렇게 소리를 지르시면 제 고막이 찢어질 수도 있다고요. 헤드셋을 끼고 있다는 것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고막이 찢어져도 저 같은 비정규직은 산재 처리도 못 받는다고요. 하긴, 제 사정을 알고 계시거나 정신이 온전하셨다면, 홈쇼핑 고객상담실에 전화해서 이런 얘길 떠들어대지도 않으셨겠죠.“비둘기를 제 얼굴을 향해 던졌어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얼어버렸죠. 비둘기도 나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영화처럼요.비둘기는 까만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작고 맨들맨들한 하얀 머리를 뒤로 움직였어요. 그러자 통통한 배가 정면으로 보였죠. 동시에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어요. 얼마나 심하게 날갯짓을 했는지 깃털이 뽑혀 공중에 날아다녔어요. 그 바람에 날카롭고 징그러운 발톱이 제 얼굴로 곧바로 날아왔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고의가 아니었다면 하필 얼굴로 날아왔을 리 없다고요. 그때, 내, 내가, 얼마나….”느낄 수 있었다. 지금 떠들어내는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이 사람은 지금 그 감정에 충분히 젖어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선 입술을 바르르 떨며 울먹일 수는 없으리라. 나도 잠깐, 아주 잠깐 이 정신 나간 것 같은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목소리뿐이지만 상대의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고객님 이제 진정하시고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여긴…”“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너무 떨려서 그랬다고, 죄송하다고, 그년이 눈물을 질질 짰지만, 전 알아요. 제가 그때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전 그때 비둘기 발톱에 긁혔어요. 아주 심하게요. 피가 줄줄 났었죠. 상상이 되세요? 하얀 천사옷을 입은 아이의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라뇨. 무슨 공포영화도 아니고, 아기 예수 탄생이었는데! 전 고래고래 악을 써댔답니다. 너무 무서웠거든요. 얼굴이 아픈 것보다도 비둘기의 뾰족한 발톱이, 뱀 껍질처럼 징그럽게 갈라진 다리의 피부 때문에요. 이제 아시겠죠? 그때 어떤 난리가 났었겠는지.”그래서 날개 달린 조류가 무서우신 거군요? 자, 이제 알았습니다. 비둘기, 닭도 싫어하는데 거위라니. 정말 싫으셨겠군요. 이제 거위털이불에 대해서 말씀해보세요. 그래야 이 이야기도 엔딩이 나겠지요. 어서요.“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처음 후원자들은 비둘기로 얻어맞은 상황이 웃겨서 키득키득 거렸죠. 그런데 제가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해대며 소리를 꽥꽥 질러대자 후원자들은 놀란 것 같았어요. 걱정스런 웅성거림이 있었죠. 몇몇 후원자들의 말소리가 들렸거든요. 분명히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때 원장님이 서둘러 무대 위로 뛰어올라오더니 제 등에서 천사 날개를 벗겨내서 미영이한테 달아줬어요. 전 그게 싫어서 더욱 새된 비명을 질러댔죠. ‘내가 천사야, 내가 천사라고!’내 괴성에 후원자들의 얼굴빛이 달라지는 걸 보진 못했지만 난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난 포기할 수 없었어요. 지옥 같은 보육원을 벗어날 방법은 천사가 되는 거였으니까요. 내가 어떻게 천사가 됐는데! 생살이 찢겨지는 아픔을 참아냈는데, 오줌을 눌 때마다 피가 섞여 나오는 고통을 어떻게 참아냈는데. 그랬는데, 나한테서 천사를 뺏어가다니. 그게 말이 되나요? 말해보세요. 말이 되냐고요!제 인생은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거예요. 사지를 갈아 젓갈을 담가도 시원찮을 미영이, 그년 때문에 제 인생이 이따위가 된 거라고요.”
은실
201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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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5
존대하다가 반말하다가, 성내다가 차분하다가. 어쩌면 이 사람 정신이 이상한 걸지도.“제가 엄청 싫어하던 미영이가 다리를 다친 비둘기를 데려왔어요. 하얀 비둘기였죠. 원장님은 그 비둘기를 평화와 천사의 상징으로 사용해보자고 하셨죠. 그 뭐냐, 극적인 효과?, 아무튼 후원자들에게 좀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전 비둘기가 무서웠지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싫다고 했다가 원장님 눈 밖에 나긴 싫었거든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장님이 비둘기를 너무 좋아했어요. 원장님은 미영이에게도 하얀 원피스를 입히고 천사 날개를 달아주고 싶어 했지만 천사 날개는 단 하나였어요. 그건 제 거라서 미영이 등에 달아줄 수 없었죠. 그냥 미영이는 하얀 원피스만 입기로 했어요. 전 그것도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왜냐고요?”고객님, 전 안 물어봤습니다.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얘기나 쭉쭉 해주세요. 곧 제 점심시간이란 말입니다. 뱃속에서 거지가 통곡하고 있습니다. 고객님도 제 배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시죠? 제발 들린다고 해주세요. 그래야 빨리 끝내주실 거잖아요?“왠지 아시잖아요. 천사는 아기 예수 탄생에서 주인공이란 말이에요. 가장 예쁘고 반짝반짝 빛나는 역할이라고요. 무대에 오르는 아이들은 모두 꼬질꼬질한 옷을 걸치거나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어요. 하얀색의 반작반짝 빛나는 옷을 입는 사람은 유일하게 저 하나라고요! 그래서 후원자들 눈에 잘 띄는 거고요. 천사 같이 예쁜 아이가 바로 저였죠. 그런데, 그 망할 년이 하얀 옷을 입는다니. 말이 안 되잖아요? 주인공은 전데. 왜? 왜, 미영이 따위가 하얗고 예쁜 원피스를 입냐구요. 천사는 단 한 명이라고요. 아시겠어요? 뭐가 문제인지?”고객님,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 이러시면 안 되죠. 천사 타령은 그만하시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면 안 될까요? 전 무교라서 천사는 잘 몰라요.“그래도 어쩌겠어요. 원장님이 비둘기를 날리고 싶어 하는 걸. 훈련된 비둘기를 데려오려면 돈 꽤나 줘야 한다는데, 우리에겐 다리 다친 비둘기가 굴러들어왔으니까요. 그래서 전 참았어요. 미영이를 계단에서 밀어버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고요. 난 착한 천사 같은 아이니까요. 실제로도 천사라고요.”네, 네. 천사 고객님.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이젠 좀 이야기 속도 좀 내주시겠어요?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요? 이제 10분 뒤면 밥 먹으러 갈 시간입니다.“지루한 시간이 다 지나고 제 차례가 됐어요. 하얗고 반짝반짝 빛나는 날개를 단 천사가 등장할 시간이었죠. 전 너무 신나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답니다. 콩닥콩닥. 그런 기분 아세요? 마치 진짜 천사가 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것 같았어요. 무대에 올라가자 모든 사람들이 저만 바라봤어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사인 저를 우러러 봤죠. 너무 좋았어요. 신나기도 했고요. 평소 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편은 아니었거든요. 저는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무대 중앙으로 가서 제 대사를 말하려고 했죠. 모든 게 완벽했어요. 그년이 망치기 전까지는요.그때였어요! 그 빌어먹을 년이!”
은실
201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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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4
“고객님, 제가…”그런 말은 다른 데 가서 하라고. 나도 내 학자금대출 갚기도 빠듯하게 살고 있단 말이야. 당신만 사정 있냐? 나도 사정이 있다고. 내가 카드값만 아니면 당신 전화 받지도 않았어. 이런 건 심리상담사나 경찰한테 말해.“그런데 왜 안 도와줘요? 이게 다 거기 때문이라고. 니네가 그 이불만 안 팔았어도, 니네가 방송만 안 했어도 이렇게까진 안 했다고! 내가 날개 달린 것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시엄마가 일부러 산 거야. 내가 비둘기만 봐도 기겁하는 걸 안다고. 심지어 난 치킨도 안 먹는 사람이란 말야. 내가 얼마나 날개 달린 것들을 싫어하는데! 그런데 왜 자꾸 나한테 그 이불을 덮어주는 거야. 난 춥지 않다고. 얇은 이불만 덮어도 되는데, 왜 자꾸 그 이불을 나한테 덮어주느냔 말이야.너네가 그랬지? 그 이불 덮고 자면 어깨 결리고 허리 아픈 게 없어진다고. 겨우 이불 하나 덮고 잔다고 그런 게 없어진다니, 말이 돼? 이불이 만병통치약이야? 이불 한 장 더 팔아먹으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로 사람을 현혹하느냔 말야. 내가 시어머니한테 아니라고, 그런 이불은 없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 TV에서 나온 거라고, TV에서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시어머니는 끝까지 우겨대더군. 내가 아니라고 입이 닳도록 설명을 해도 안 믿어. 그래서 내가 그랬지. 시어머니나 덮으라고. 그랬더니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 그것도 그 거위이불을 덮어씌우면서! 내가 얼마나 날개 달린 것들이 싫은 줄 알아?어렸을 때였어. 내가 일곱 살 때였지. 크리스마스이브. 그날은 특별했어. 내가 천사를 하기로 했거든. 하얗고 커다란 날개를 등에 매달고 머리엔 하얀 관도 쓰는 거였어. 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우리 원장님이 날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알아?”과거를 회상하는지 말이 잠깐 끊겼다.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들었지만 빌어먹을 고객님은 자기 할 말만 해댔다. 진상 고객들의 기본 매너라고 할까. 남의 말 안 듣기.“천사를 하는 아이는 항상 입양이 됐었어. 후원자들은 천사 날개를 단 아이를 제일 눈여겨보거든. 그래서 내가 그 날개를 달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원장님이 그 얄미운 미영이한테 천사 역할을 시키려는 걸 막으려고 직접 원장실까지 찾아갔다고. 나는 알고 있었거든. 원장님이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거. 하지만 그런 거야 몇 번만 참으면 되니까. 천사만 되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꾹 참았어. 그래 몇 번이야, 잠깐만 참으면 되, 몇 번만 참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어. 입양만 되면!”삶이 참으로 고되셨겠네요. 어린 나이에 추악한 짓까지 당하셨군요. 그래도 그땐 무작정 행복해도 좋을 나인데. 지긋지긋하게 긴 인생(발달된 의학의 혜택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진 것이 과연 행복일까? 겨우 하루를 연명하는 나 같은 하층민에게 의학의 발달은 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어쩌면 금수저를 가진 자들의 저주일지도. 금수저를 배부르게 하려면 금수저를 떠받치는 노예들, 흙수저가 필요할 테니. 어쩌면 의학의 발달은 돈 있는 자들의 꼼수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너무 배배 꼬인 것일까?)에서 가장 좋을 때라면 철없이 엄마 아빠한테 이것저것 사달라고 떼를 쓰며 세상을 자기 맘대로 살던 어린 시절이 아닐까. 어른만 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상상하던 철없는 시절 말이다.그런데, 나 이거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니? 당장 112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몰라. 어쩌면 이 고객님 심심해서 나랑 놀자고 하는 걸까? 괜히 112에 신고했다가 귀찮아지는 거 아니야? 내 삶도 고달픈데 남의 삶에 끼어들 여력은 더욱 없는데. 그냥 대충 들어주다가 제 풀에 지치면 끊겠지? 밥 먹으러 가기 전에 소설 한 편 듣는다,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그런데 그날 일이 벌어졌어요.”
은실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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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3
혓바닥에 고인 침과 초콜릿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서둘러 꿀꺽 삼켰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다. 고객과의 게임에서 난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검을 놓친 거나 마찬가지였다.왠지 시작이 좋지 않다.“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상담사 한지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묵묵부답. 목덜미에 솜털이 바짝 솟았다. 다시 박팀장한테 끌려갈 것을 떠올리니 혼백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카드값 문자까지. 누군가 턱 밑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달까.“고객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사래가 들려서요.”혹시나 싶어서 걸려온 번호를 재빨리 입력해 고객정보를 확인했다. 브이브이아이피(vvip)고객이었다. 더욱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도와주세요.”“무엇을 도와드릴까요?”“구스다운인가? 거위털이불 때문에 전화했거든요.”또 거위털이불이다. 거위들이 집단으로 날을 잡았나.“이불 안에 시체가 들어 있어요.”“네. 도와드리기에 앞서 먼저 고객님 성함 확인 부탁드립니다.”“시체가 있다고요.”“네, 고객님 먼저 성함을…?”뭐라고? 방금 시체라고 한 건가? 어이가 없었다. 시체라니 거위 시체라도 들어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또 한 번 저승사자한테 끌려갈 것 같은 기분 더러운 예감이 든다.“고객님, 뭐가 들어 있다고요?”“우리 시어머님이에요.”헐. 나랑 장난하자는 걸까? 대체 뭐라고 떠들어대는 걸까?“고객님, 이 통화는 통화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녹음이 되고 있습니다.”“제가 죽였어요.”이 뜬금없는 자백은 뭘까. 여기가 112야? 그런 건 112에 신고하라고.“고객님, 죄송합니다. 여긴 홈쇼핑 고객상담실입니다. 고객님께서 말씀하신 사항은 도와드리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거기서 산 건데요. 그것만 산 줄 아세요? 거기서 판매하는 상품 대다수는 우리 시어머니가 죄다 사들였다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돈이 많은 줄 아세요? 남편은 매일 집구석에서 뒹굴거리다가 지겨우면 겜방에 가서 게임이나 하다 오는 건달이나 다름없고. 시어머니는 TV 앞에 들러붙어 종일 홈쇼핑에서 물건을 사댔어. 무슨, 쇼핑중독? 아마 그런 거였을 거야. 어제 산 걸 일주일 후에 또 사고, 한 달 뒤에 또 사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같은 물건 환불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홈쇼핑에서 물건을 사대기만 하는지. 사들인 물건들 때문에 집에 발을 디디기도 힘들 지경이라고.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허리가 휘고 지문이 닳도록 일해서 번 돈이라고. 내 피같은 돈을 전부 너네한테 퍼 날랐단 말야. 그거 전부 내 돈으로 산 거라고!”
은실
201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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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2
아, 역시나. 벌써 두 달 전에 판매된 상품인데 이제 와서 전화를 건 거 보면 진상이 확실하다. 이런 사람이 원하는 것은 환불 아니면 보상금이다. 회사 측에서는 최대한 그런 고객을 달래서 환불을 막도록 교육을 시키지만, 사람 마음 돌리는 게 쉬운 일인가? 그것도 이미 단단히 독이 오른 사람 마음을.오늘 하루도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악령들과 씨름이구나. 악령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목숨 부지해서 무사히 퇴근하려면 성질 죽이자. 안 그러면 당장 쫓겨날지도 모르니까.그런데 어쩌면 오늘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저승사자한테 끌려갈지도 모르겠다. 이 고객 만만치 않다. 죄송하다고 몇 번을 말해도, 환불을 해주겠다고 해도, 고객을 기만한 것에 대해 정신적 피해보상을 해달라고 우긴다. 역시나 블랙답다.블랙은 일명 블랙리스트에 오른 고객을 말한다. 회사는 우량 고객을 브이브이아이피(vvip), 골드(gold), 실버(silver) 등의 계급으로 분류하는데 진상 고객도 등급을 분류한다. 진상 중 최하급 고객은 옐로우(yellow), 그나마 잘 달래면 되는 등급이다. 기분파 고객이라 응대만 잘하면 오히려 다루기가 편하다. 레드(red)는 까칠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감정적으로 폭발하는 진상들이다. 여기가 지들 스트레스 해소하는 데야?, 싶을 정도로 바락바락 악을 써댄다. 이들은 그냥 들어주는 것밖엔 답이 없다. 무슨 말을 해도 욕과 소리를 질러대니까. 그러다 지 승질에 못 이겨 전화를 끊어버리는 게 대다수. 결국 그들은 아무 보상도 못 받아내는 실속이 전혀 없는 진상들이다. 대신 그 모든 욕과 진상짓을 받아내는 우리만 죽어날 뿐이다. 그 다음이 블랙(black)이다. 이들은 대책도 대응 방법도 없다. 이들 중에는 아주 개차반인 사람들도, 이성적으로 따박따박 오류와 잘못을 지적하며 보상금을 타내는 이들도, 레드라벨처럼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다가도 이성적으로 따져대는 이들도 있다. 총체적난국인 최대 진상 고객 등급이라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는 이들에게 환불을 해주는 것을 최선의 방침으로 내밀 뿐. 방법이 없다. 환불도 회사에서는 최대한으로 양보한 거니까.그런데 이 고객 너무한다. 말을 놓는 것까진 이해가 되지만 나를 사기꾼 취급하며 거친 말을 해대는 건 못 참겠다. 아니, 내가 속였어? 이런 건 제조사에 따지란 말이야. 나한테 30분 동안 조목조목 잘못을 따질 바엔 그냥 니가 이불을 만들라고!치솟는 화를 삭이는데도 블랙은 감당이 안 된다.‘유 윈(You win)!!!’이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고 싶은 열망으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겨우 6개월차 홈쇼핑 고객상담사인 내가 블랙라벨이라니. 이런 건 능숙한 전문가에게 부탁해야 한다. 나 같은 초짜 감정노동자는 상대할 수 없다. 결국 나는 내 상관인 박팀장에게 SOS를 요청했다.극심하게 허기가 졌다. 몇 시인지 보려고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와 있다.‘한지민님 ○○ 카드(12월 17일 기준)결제대금 미납으로 타사와 연체 정보가 공유될 수 있습니다.결제대금 확인 후 입금바랍니다.’아, 잊고 있었다. 카드값을 넣어놨어야 했는데 깜빡했다. 젠장. 난 쓴 게 없는데 왜 항상 돈이 부족한 거지. 그런데 이 싸가지 없는 메시지 좀 보소. 내가 지네 카드를 써주는 고마운 고객인데, 연체 정보를 뭐 어째? 내가 어쩌다 한 번 카드값 넣는 거 잊었다고 이따위 메시지를 보내? 더럽고 치사하다. 지킬과 하이드도 아니고 웃는 얼굴 뒤에 칼을 품고 있네. 요망한 것들.시간을 확인하기도 전에 짜증이 왈칵 밀려들었다. 아침부터 블랙라벨한테 시달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저승사자 팀장에게 끌려가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서 그런 걸까. 어제 잠을 푹 잤는데도 눈 밑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온 기분이었다. 이번 주는 점심시간 근무라서 밥을 먹으려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통화가 끝나자마자 재빨리 초콜릿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초콜릿이 혓바닥 위에서 다 녹기도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정성을 다, 우, 음. 죄송합니다.”
은실
201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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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고객상담실로 전화한 천사_1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상담사 한지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오늘도 지겨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쳇바퀴를 돌 듯 똑같고 똑같은 일상. 내 삶은 왜 이 모양일까. 이름만 대면 대한민국 누구나 다 아는 좋은 대학을 나왔고 학과도 공부를 잘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모르겠다. 어쩌다가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렸는지.“혹시요, SNS 하세요?”잘나가는 대학 동기들 소식을 들을 때면 ‘OTL스런 감정(좌절감에 땅을 치는 감정 표현의 발로랄까. 이 이모티콘은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내 패배감에 찌든 기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에 빠져들었다. 대학 땐 찰떡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들의 연락도 서서히 피하기 시작했다. 한때 같은 강의를 듣고 같은 시험을 봤던 친구들이었지만 그 아이들은 나와 부모가 달랐다. ‘돈 많은 부모’라는 옵션은 친구들과 나의 격차를 크게 벌려놓았다.잘나가는 삶을 살며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동기들. 그들의 SNS에 올려진 행복에 겨운 사진을 보기 싫어 SNS 친구 관계를 끊은 것은 오로지 나의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좋아요’가 아닌 ‘싫어요’를 꾹꾹 누르고 싶은 동기들의 SNS를 왜 몰래 들여다보고 있을까.SNS에 올라온 사진들은 패턴이 비슷했다.1. 장소는 스타벅스. 때로는 고급 레스토랑. 2. 테이블에 스타벅스 머그컵을 올려놓는다. 꼭 스벅이어야 한다. 그래야 간지가 살거든.3. 그 옆에 새로 구입한 명품 신상 가방을 배치한다. 여기서 가방은 신상 옷이나 구두, 선물 받은 악세서리 등으로 바뀐다.4. 모든 배치가 끝나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예뻐 보이는 각도로 셀카를 찍는다. 5. 그 아래 감성 돋는 짧은 글. ‘힘겨운 업무를 끝내고 내 자신을 위로하는 커피 한 잔. 맛있는 커피 한 잔으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지랄하네. 커피 마시면 잠 안 온다고 지랄하던 년이. 가방 자랑하려고 올린 거고만. 근데 얘 얼굴 왜 이래? 내가 아는 은영이 맞아? 헐. 이거, 이거 양악했고만? 어쩐지 한동안 사진 안 올린다 했더니만. 역시 돈이 좋구나. 이년 우리 학교에 겨우겨우 턱걸이로 들어와놓고. 나보다 공부도 못했던 게. 치, 웃겨.나도 모르게 중얼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아니다. 진짜 웃긴 사람은 나다. 남을 질시하고 시기하는 사람. 무조건 깍아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나. 찌질하다. 과거만을 떠올리며 추억하는 나 같은 인간. 정말 추하다. 내가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지다니.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혼자 중얼대고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지. 그렇다고 내가 작당하고 악질적으로 험한 말을 유포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중얼대지도 못해?그런데 이 고객 불안하다. 이 일을 6개월 한 사람으로서 SNS를 들먹이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봤다. 진상 냄새가 풍긴다. 조심하자.“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제가 얼마 전에 구입한 구스다운이불말예요. 그거 어떤 사람이 페북에 올렸던데, 그거 안에 거위털이 조금밖에 없다던데. 표기된 충전재 함량에 미달된다면서요. 분명 표기는 유럽산 구스다운 솜털 95%, 깃털 5%였잖아요. 그런데 깃털이 1%도 채 안 된다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은실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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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Land] 김경란 소설가 행복 프로젝트_마지막 회
내가 작가가 된 이유는 행복해지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지금도 난 내가 아닌 저 미친 기계덩어리에 의해 행복이 규정되었다. 물론 스타 작가에 대한 허황된 욕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것도 나를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엄마의 잘못된 생각을 되돌리기 위한 것이었다.내가 꿈꿨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다. 화가 났다. 그동안 서른여섯 해를 살아오면서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화가 폭발하려는 찰나였다. 정말정말 화가 났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행복을 강요당하며 웃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서재 벽에 액자를 걸려다가 못해서 한쪽 구석에 치워두었던 망치가 눈에 띄었다.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서재에 설치된 하우스키퍼 센서를 망치로 때려 부수고 잡아 뜯어낸 후였다. 컴퓨터도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재 밖 거실과 안방에서는 요란한 경보가 울렸다. 거실로 나와 보니, 이미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방범창이 내려져 있었고, 하우스키퍼의 냉랭한 경보음이 귀를 찢을 듯 울리고 있었다.“멈춰! 멈추라구! 미쳤어?”난 휴대폰으로 하우스키퍼를 해제하려고 했으나 스크린터치가 전혀 먹히질 않았다. 이성을 잃고 망치를 휘두르다가 같이 망가진 게 분명했다. 그때 천장 스프링클러에서 물이 쏟아졌다. 차가운 물벼락을 맞으니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하우스키퍼가 오류가 난 게 분명했다.현관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열려고 시도를 해봤지만 문이 꿈쩍도 하질 않았다. 망치로 두드려도 봤으나 단단한 철문은 요지부동이었다. 거실로 돌아와 방범창을 열어보려 했으나 그것도 마찬가지였다.거실에 매달린 하우스키퍼 센서에 소리를 질렀다. 여러 차례 멈추라고 소리를 질러대도 반응이 없었다. 거실 벽에 걸린 스크린터치 액정을 손바닥으로 몇 번을 두드리자 그제야 꺼졌던 화면이 켜졌다. 화면에는 ‘김경란 행복 프로젝트’라는 제목의 리포트가 펼쳐져 있었다.뭔가 싶어 눈으로 훑으며 빠르게 읽었다. 수십 쪽 분량의 리포트가 빠르게 장면 전환되며 넘어가고 있었다. 차분히 읽을 틈은 없었지만 대략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하우스키퍼는 그동안 내가 컴퓨터로 끄적였던 일기장을 분석했던 것 같다. ‘유명해지고 싶다.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다’ 등의 내가 일기장에 썼던 내밀한 욕망의 문장들이 캡처되어 리포트 곳곳에 박혀 있었다.하우스키퍼는 그 첫 번째 단계로 내 소설을 유명해지도록 만들 수 있는 잡지사 편집자들의 메일이나 컴퓨터를 해킹하고 그들이 나에게 원고를 의뢰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내가 원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소재나 여러 자료를 모았으며 내가 쓴 원고를 교정하면서 수정작업까지 했다고 했다.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모든 것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리포트 마지막에는 내가 ‘위험인물’로 분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우스키퍼를 파괴하고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악영향에 대해 파헤치는 소설을 쓰는 작가로, 향후 하우스키퍼 인공지능 발전을 저해하는 인물로 평했다. 그러면서 위험인물 제거를 위해 가스 누출 폭발 사고가 적당하다는 살해 방법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김경란 작가 제거 후 남편 최진우에 대한 프로젝트까지 적혀 있었는데, 그 부분을 읽으려고 화면을 터치하는 순간 화면이 검게 변했다. 화면에는 ‘Good Bye’라는 하얀 글자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내가 읽은 모든 것을 자세히 쓰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아주 간략하게만 썼다. 아마 하우스키퍼 백업 데이터에는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리포트가 있을 것이다.)내가 썼던 소설의 도입부가 떠올랐다. 진짜로 하우스키퍼가 날 죽이려는 것이었다!안방으로 달려갔다.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안전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 믿을 뿐이었다. 안방에는 하우스키퍼 센서를 전혀 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치기사가 달아야 한다고 우겼지만 왠지 남편과 나의 내밀한 사생활이 센서로 감지되는 게 싫어서 달지 않았다.화장대 서랍 깊숙이 넣어놓았던 계약서와 만년필을 꺼냈다. 집에 유일하게 있는 종이와 펜이었다. 계약서의 하얀 백지에 만년필로 두서없이 끄적인 이 글을 읽을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래도 써야 했다. 난 글쟁이니까.
은실
2016-01-21